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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하나 - Let's be new

쿠엔틴 타란티노가 역사를 배제하는 방식

본 글은 알레프 1호 <Let's be new>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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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터즈>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유명한 경구다. 당연한 말을 그럴듯하게 적은 것 같지만 여기에는 깨나 심오한 진리가 담겨있다.

 

영어권에서는 이걸 “Dead Men Tell No Tales”라고 표현한다. 번역하면 “죽은 자들은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다” 정도겠다. 남의 언어를 굳이 끌어온 건 이 구절에서 핵심이 (우리말에는 쏙 빠진) ‘Tales’, 즉 ‘이야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풀어 써보자. “죽은 자는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다. 오로지 산 자의 말들로 이야기는 (재)구성된다.”

 

이제 경구는 역사와 기록에 대한 내용으로 좁혀진다. 역사는 오롯이 산 자의 말들로 이뤄진 이야기들로만 존재할 수 있다, 는 진리 말이다.

 

명료해진 것 같지만 문제는 간단치 않다. 죽은 자를 제거했지만, 산 자는 훨씬 많다. 죽은 자에게는 이야기가 없다, 는 말은 곧 수많은 산 자들이 만드는 이야기들로 역사는 ‘재구성’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누구의 것이며, 과거는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가.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과거와 현재의 시차 속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역사,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듣고 보고 읽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지금까지 영화라는 장르에서 재현은 주요 ‘방식’이었다. 사실에 기반을 둔 영화들은 철저한 고증과 조사를 거쳐 최대한 ‘사실’에 가까운 방향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지상명령이었다.

 

이런 중에 최근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들은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말하자면 ‘대체역사’ 정도의 장르(<바스터즈>, <원스어폰어타임 인 할리우드>)를 통해 그는 재현 자체를 하나의 주제로 전면화한다.

 

 

ㅡ 오롯이 감정뿐...타란티노가 원혼(冤魂)을 기리는 방식

 

<바스터즈>와 <원스어폰어타임>은 모두 비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전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에 대한 나치군의 만행을, 후자는 찰리 맨슨 무리가 영화배우 샤론 테이트를 포함해 5명을 무참히 죽인 사건을 다룬다.

 

타란티노는 이 영화들에서도 특유의 마초적이면서 거침없는 연출을 뽐내는데, 무엇보다 이 영화들의 독특함은 결말 부문에 있다. 실제 기록된 사실들과 정 반대의 방향을 취하는 것이다.

 

<바스터즈>에서 아돌프 히틀러(마틴 부트케 분)는 극장에서 무참히 총살당하고, <원스어폰어타임>에서 찰리 맨슨 무리는 허구의 인물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과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 분) 등에게 무참히 살해당한다.

 

이대로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보다 일찍 끝나 불필요한 희생이 줄 수 있었을 것이고, 샤론 테이트는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지금까지 유명세를 떨쳤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물론 타란티노는 이런 ‘만약’이라는 가정을 위해 이 영화들을 만들지 않았다. 히틀러의 죽음이나 맨슨의 살해를 기점으로 그 이후의 시점에 대해 타란티노는 관심이 없다. 그랬다면 영화는 히틀러가 일찍 죽거나 맨슨이 살해에 실패한 이후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됐을 것이다.

 

그러니까 타란티노가 관심을 둔 것은 오로지 히틀러와 맨슨이라는 존재 자체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영화를 오로지 하나의 ‘퍼포먼스’, 즉 거대한 나치 깃발을 뒤로 한 채 무자비한 총질을 당하는 히틀러와, 고어물을 연상시킬 정도로 잔인하게 짓이겨져 하나의 ‘덩어리들’이 돼버리는 맨슨 무리들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장면들은 하나의 ‘제의’로 읽힌다. 억울하게 죽은 혼령들을 위로하는 조금은 괴기한 방식의 의식. 죽은 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가상’이라는 영화적 장치를 적극 활용해 불가능한-복수를 감행하는 것.

 

하지만 말이 없는 죽은 자는 눈과 귀도 없다. 이 ‘피의 제의’는 오로지 살아있는 자, 그러니까 쿠엔틴 타란티노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장면들을 보면서 형용하기 어려운 전율 같은 것을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원혼을 경유해 결국은 타란티노 자신의 감정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며 이 영화는 감정의 덩어리가 된다.

 

 

ㅡ‘부관참시’의 미학...탈-재현의 장르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들은 단순히 '감정적 배설물' 그 이상이다. 타란티노는 솟구치는 감정적 과잉을 절제한다. 터질 것 같은 감정을 대놓고 분출하지 않으면서, 반대로 차가우면서도 일종의 '불감증'적인 시선으로 히틀러와 맨슨 무리를 지켜본다. 

 

뜨거운 용암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휴화산처럼, 타란티노는 감정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철저히 배제하는 작업에 성공한 듯 보인다.  

 

이게 가능한 것은 히틀러와 맨슨이 (사실상) 한 번씩 죽었기 때문이다. 이미 죽은 존재들을 다시 소환해 복수하는 것은 죄를 짓고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고 살고 있는 대상을 죽이는 것보다 감정적 요소가 영향을 덜 미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타란티노의 이 영화들에서는 ‘부관참시’가 떠오른다.

 

부관참시란 죽은 뒤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식이다.

 

이 행위는 그 시체와 연관된 사실들을 돌이키지만, 바로 그 시체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재현을 통해 재현을 부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바스터즈>와 <원스어폰어타임>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들은 과거의 한 장면을 끄집어옴으로써 그 과거를 싸그리 부정한다. 타란티노는 히틀러와 찰리 맨스를 소환하면서 당대의 유럽과 헐리우드를 기억해내지만, 동시에 그 둘을 무자비하게 죽여 거리를 둔다.

 

두 인물이 모두 이미 죽어있다는 점도 부관참시의 의미를 더한다. 히틀러는 (영화 제작 시점에서) 생물학적으로 죽은 상태이고, 찰리 맨슨은 사회적으로 죽은 상태라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둘은 이미 죽어있는 존재다.

 

그런 타란티노에게 재현의 문제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달리 말해 재현의 형식으로 재현을 외면한 것이다. 재현의 영역을 벗어난 재현의 형식이자, 재현을 거부하는 탈-재현의 장르인 셈이다.

 

이 영화들을 관통하는 질문들. 잔혹성은 재현돼야 하는가. 끔찍한 과거, 다시는 보고싶지 않은 기록을 다시 떠올리는 행위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비유컨대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물 속으로 빠뜨리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최대한 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이 현명한가.

 

짐작건대 그는 이런 고민 중 후자를 택했고, 이것이 그의 탈-재현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다시, 죽은 자는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살아있는 자 중 하나인 타란티노는 죽은 자를 노려본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로 그는 죽은 자의 목소리를 외면하려 한다. 마침 죽은 자도 말이 없다. 그러면 결론은 하나다.

 

다시 죽는 수밖에.

 

 

*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