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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하나 - Let's be new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은 짜릿해 언제나 새로워

본 글은 알레프 1호 <Let's be new>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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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허할 땐,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봅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것들을 미워하게 될 때. 왠지 계속 억울한데, 대놓고 삐죽 대지는 못하겠고, 결국은 소심하게 혼자서만 삐죽거리게 될 때. 오늘을 포함한 앞으로의 시간이 온통 좌절일 것만 같을 때. 그러니까 내 안의 사랑이 파삭하고 없어질 때 말이다. 

 

3월에 내가 그랬다. 오늘과 내일과 앞으로가 전부 버거웠다. 나는 무엇이든지 미워하겠다고 작정한 사람처럼 히스테릭했다. 그때는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스스로가 무서웠다. 무언가에 감동하고 사랑과 애틋함을 느끼고 소중하게 다룬다는 감각 자체가 내 안에서 아주 사라져 버린 기분이었다. 영화를 감상하지 않은지도 꽤 오래된 상태였다. 영화를 안 봐서 내가 지금 이런 건가? 

 

그렇게 다짜고짜 영화를 보려고 인터넷을 검색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들의 예고편을 보았다. 그 중에 <조조 래빗>이 있었다. 귀여웠다. 귀여운 영화를 보면 내 마음도 말랑해지겠지. 그런 마음으로 나는 외출을 했고 <조조 래빗>을 보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을 배경으로, 주인공 조조와 엄마 로지, 그리고 유대인 엘사의 시간이 이어졌다.

 

 

로지 : 삶은 신의 선물이야. 신의 축복에 감사하기 위해 춤을 추자.
조조 : 싫어요. 춤은 실업자들이나 추는 거예요.
로지 : 자유로운 사람들이 춤추는 거야.

 

 

<조조래빗>은 오직 사랑만을 선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르륵 눈물을 쏟고 영화관을 나오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발걸음이 사뿐사뿐 가볍게 느껴졌다. 조조와 엘사가 그랬듯, 나도 춤을 추고 싶다는 마음이었고 무언가를 사랑하거나 애틋함을 느낄 때의 고양감 같은 것이 나에게 있었다. 그걸 그냥 흘러 보내기 싫어서 산책을 했는데 지나가는 자동차,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걸어가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영화 뽕인가, 싶을만치 풍경이 유독 달라 보였다.

 

모든 영화가 내게 그런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 테다. <조조래빗>이 내 예상보다도 훨씬 귀엽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말랑한 상태(?)일 수 있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마음 저 밑에서부터 끌어 오르는 벅참(!)이 있으니까. (보통 그렇지 않나요?) 그 벅참이 때로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를테면 함부로 미워하지 말아야지, 사랑을 해야지, 마음을 너무 아끼지 말고 써야지. 이런 다짐을 새롭게 하게 되는 것이다. 더 좋은, 새로운 사람으로 갱신되고 싶다는 기분. 나의 이 모든 기분은 조조 덕이었다. 그부터가 영화 속에서 갱신해나가고 있었으니까. 매순간 귀엽고 사랑스럽게!

 

 


사랑을 알아가는 사람은 귀엽습니다

 

<조조래빗>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히틀러, 유대인, 전쟁. 진실과 상관없이 미워하는 마음이 만연하다. 조조 역시 그렇다. 조조는 10살 꼬마에 겁이 많다. 히틀러를 세상에서 제일 존경한다. 그는 상상 속 히틀러와 가장 친하다. 조조는 엄마 로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데, 신발끈 묶는 방법을 아직 몰라서 엄마가 늘 묶어 준다. 히틀러와 엄마는 성향상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지만, 어쨌든 조조는 겁이 날 때면 히틀러나 엄마에게서 힘을 얻는다. 

 

 

 

10살 조조의 일상에도 미워하는 마음이 만연하다. 잘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딱히 알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조조는 유태인에 대한 통념을 충실히 익히고 따른다. 그게 쉽고 또 익숙하니까. 그런데 별안간 조조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 믿었던 자신의 집에서 유대인을 만난다.

 

엘사 : 난 귀신 아냐. 더 나쁜 건데. 내가 뭔지 알고 있지?
조조 : 몰라.
엘사 : 아니, 알잖아. 말해 봐. 말해!
조조 : 유대인.

 

이때부터 조조는 엘사에게 자신의 편견을 마구 표현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알아가기 시작한다. 더 알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조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갱신이 시작된다. 

 

 

 

조조는 엘사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다. 상처를 주기도 한다. 편견이 드러나는 순간이니까. 조조는 자신의 생각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임을 안다. 그것이 또 신경 쓰인다. 쭈뼛거리며 엘사에게 연필을 쥐어 주는 식으로 주고받음이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조조에게 오직 유대인일 따름이었던 엘사는 '유대인이고 누나의 친구였고, 결혼을 약속한 피앙세가 있으며, 가끔은 무섭지만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엘사를 엘사로 알아가면서 조조의 뱃속은 간질간질하다. 나비가 가득 찬 것처럼. '로맨스는 바보 같다'고 말하던 조조가 어느새, '엄마에게 우린 친구라고 말할게.'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조조의 마음에 사랑이 깃든다. 

 

 

 

조조의 내적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 가는 때에 조조의 바깥 세계도 예기치 못하게 요동친다. 엄마 로지가 독일군에게 숙청을 당해서 죽었고,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는 와중에 적군들이 독일에 몰려온다는 소식만이 선명하다. 조조와 로지는 이제 서로 뿐인 상황에서, 서로의 어깨를 빌려 준다.

 

조조 : 자유로워지면 제일 먼저 뭘 할 거야?
로지 : 춤출 거야.  

 

 

 


기어코 용기를 내는 사람도 귀엽고요

 

거짓말처럼 전쟁은 끝이 난다. 독일이 졌으니까 엘사는 이제 자유롭다. 그럼 엘사는 떠나는 걸까? 그게 두려운 조조는 엘사에게 거짓말을 한다. 독일이 이겼다고. 조조는 다시 겁쟁이가 되었고, 엘사는 감옥같은 좁은 방으로 들어간다.

 

 

어떤 갱신에는 솔직함, 그러니까 자신이 두려워하는 상황이 설령 온다 하더라도 기꺼이 감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조조는 엘사에게 거짓말을 한 이후에야 그걸 안다. 자신의 말이 또다시 엘사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걸. 조조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 조조는 엄마의 용기를 떠올리고, 철장에 갇혀 있는 토끼 그림을 본다. 스스로를 겁쟁이라 생각했던 때 그렸던 그림이다. 이제는 어째 엘사와 닮았다. 철장에 갇힌 토끼는 행복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조조는 용기를 내어 엘사에게 다가간다. 

 

조조 : 널 사랑하거든. 날 동생으로 생각하는 거 알지만 괜찮아. 동생 한 번 믿어볼래?

 

 

조조의 용기는 계속 이어진다. 두려워하면서도 동경했던 상상 속 히틀러를 발로 뻥 차버린다. 더 이상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마음이 되어, 조조는 엘사와 함께 집밖으로 나가기 전에 묻는다. 

 

조조 : 준비 됐어?
엘사 : 응. 밖은 위험해?
조조 : (찡긋) 엄청!

 

 

용기를 낸 한걸음. 그리고 바깥은 평화롭다. 엘사는 그제야 독일이 졌다는 것을 알고, 거짓말을 한 조조의 뺨을 때린다. 조조는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것마저도 너무 귀여운 용기다!) 그리고 조조는 엘사에게 묻는다. 이제 뭐하지?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된다. 어디선가 음악이 시작되고, 두 사람은 어깨를 살랑살랑 흔들더니 이내 춤을 춘다. 이제 막 자유로운 사람들처럼. 

 

 

 


<조조 래빗>은 귀엽고 사랑스럽고 아무튼 다 했습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자뭇 심각해지지 않고 조조의 세계를 끝까지 내비치는 영화의 선택이 나는 좋았다. 사랑을 알아가며 용기를 내고 야마는 한 사람의 갱신이 귀엽고 사랑스러웠고, 그 때문에 내 안에 벅참이 있었으니까. 상황이 아무리 바닥을 치더라도, 결국 앞으로 향하는 한 걸음의 에너지 같은 벅참이. 영화관 밖을 나오며 산책하는 내내 마음이 두둥실 뜨는 기분이었던 건, 그런 벅참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로 나는 조조처럼 사랑을 하고 싶어 졌다. 나 자신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나 상처 주지 않는 삶을 꾸리기 위해. 이따금 내 삶이 버거워 마음이 파삭하고 없어질 때마다 <조조 래빗>을 떠올리려 한다. 문 안에서 가만히 있지는 말기. 신발끈 동여매고 밖으로 나가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솔직하게 사랑을 하고 둠칫 둠칫, 춤을 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