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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우리의 인생 영화

1-2. [레퀴엠] A와의 대담

 

[A에 대한 간략 소개] 
■ 초등학교 6학년 때 힙합과 사랑에 빠짐
현재 영상학과에서 졸업을 준비하고 있음
MBTI는 INTJ (몇 년 전에는 INFP였음)

 

 


첫 번째 대담(!) 

 

: (어색) 안녕!

A : 안녕.

 

 : 레퀴엠을 인생 영화라고 추천한 이유가 뭐야?

 

: 그 전에는 영상 언어를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감정을 영상으로 전달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딱히 체득하지는 않았는데 레퀴엠을 보고 처음으로 확 느꼈어. 컷의 조합만으로 감정이 이렇게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구나, 하고.

 

 : 언제 봤던 영화야?

 

: 스무 살.

 

 : 레퀴엠을 보기 전에는 영화를 어떻게 생각했어? 

 

: 그때는 영화를 파지도 않았지. 영화 때문에 영상학과에 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레퀴엠을 기점으로 영상 언어에 관심이 생겼고, 더 생각하게 됐어.

 

 : 그러고 보면 너는 영화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거 같아. 예전에 영화 <아이엠러브>도 이야기했었잖아.

 

: 드라마가 아니고 영화잖아. 그래서 영화에 대사가 많으면 많은 대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하등 쓸모없는 이유라도 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 왜 영화적인 영화가 매력적이야? 영화니까 당연히 영화적이어야 한다는 것 말고.

 

: 대답하기 어려운데. 난 그냥 그런 게 좋아. 난 예상 못한 걸 보는 걸 좋아해. ‘이걸 이렇게 했네?’ 이 감정을 좋아해. 음악도 비슷해. 꼭 힙합이 아니더라도, ‘이런 접근법을 취했네?’ 이런 거. 웬만한 것들에는 법칙이 있잖아. 그런데 법칙들 사이에서, 그 법칙을 지키면서도 완전 다른 걸 보여주는 게 좋아. 내가 영화를 봤다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그래도 영화가 그냥 원하는대로 연출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 좋고 나쁨이 있고 옳고 그름이 있는데, 옳고 그름을 지키면서 좋을 때,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거 같아. 물론 꼭 옳아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글렀음에도 좋으려면 그 그름에도 이유가 있어야겠지.

 

 : ‘이 사람,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겁나 똑똑하다!’ 이런 느낌인 건가?

 

: 단순하게 ‘와’ 야. 환희.

 

 : 예술...인가 !!

 

: 예술적이라는 게 뭐냐,라고 했을 때 딱히 할 말은 없는데. 그래도 그런 감정은 예술에서 느끼는 것 같아.

 

 : 그럼 레퀴엠을 보고 환희를 느낀 거야?

 

: 그 정도는 아니었고.

 

 : 무어ㅑ!

 

: 그런 걸 영화로 느낄 수 있겠다는 힌트를 얻은 거지. 영화에 관심을 두고 싶다는 생각이 생겼지.

 

 : ‘놀라움을 영화에 기대해도 되겠다. 좋아해도 되겠다.’ 같은?

 

: 되겠다기 보다는...

 

 : ‘영화를 좋아한다?’

 

: 무관심의 영역에 있던 게 관심의 영역에 들어온 거지.

 

 : 그게 그거지.

 

: 좋아해도 되겠다는 약간 간 보다가 선택한 거 같잖아.

 

 : (그래 내가 졌다...)

 

 


레퀴엠 이야기 

 

 : 영화 레퀴엠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퀀스는 뭐였어?

 

: 오프닝 시퀀스에서 나오는 화면 분할과 크레딧 장면이 기억에 남아.

 

 : 나도 화면 분할이 인상적이었어. 해리가 마리온과 대화하는 씬에서도 화면 분할을 쓰잖아. 분할하지 않고 컷을 계속 전환해도 될 텐데, 한 화면에 담아서 더 보는 재미가 생겼던 것 같아. 의미도 더 살았던 것 같고.

 

: 별거 아닌 편집일 수 있는데, 강점이 있는 것 같아. 감정을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 나는 영화 말미에 사라가 외출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 사라는 슬로우로 천천히 이동하는데, 주변은 빠르게 지나가는 컷 있었잖아. 사라의 시간과 바깥의 시간이 다르다는 게 확 체감되었던 거 같아. 사라에게 마음이 쓰였어. 혼자가 된 느낌이겠다, 외롭겠다, 그런 마음. 영화 레퀴엠이 정서적으로 터치하는 영화는 아닌데 왜 나는 그런 마음이 되었을까.

 

: 나는 레퀴엠이 정서적으로 터치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화면을 분할하고, 몽타주를 반복하고, 조명을 세게 넣고. 되게 판타지스럽잖아. 카메라를 통해 인물들의 감정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편이고. 관객과 인물 사이에 거리를 두고자 했다면 굳이 환상적인 연출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몽타주로 마약 같은 경험을 제공하기도 하고. 결국 관객이 인물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한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정서적으로 많이 드러내는 영화라고 생각했어. 마약에 더 의존적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을 잘 보여준다고.

 

 : 나는 영화가 차갑다고 생각했어.

 

: 인물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을 뜻하는 거라면 차가운 것 같아.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의 상황을 최대한 이해시키지만, 그리고 어떤 감정인지도 최대한 보여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감정에 공감하라고는 하지 않잖아.

 

 : 응, 그래서 이 영화가 나에게 이상했어. 보통 스타일리시한 영화를 보면서 ‘요즘의 나’를 고민하게 되진 않거든. 레퀴엠을 보면서 영화 <메멘토>도 떠올랐는데, 그걸 보면서 ‘나’를 생각해보진 않았어. 그런데 레퀴엠을 보면서 나에게 마약은 뭘까? 내가 어쩔 수 없이 의존하게 되는 것은 뭘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고, 그게 나에겐 신기했어.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

 

 

 

 

 

 : 중독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되더라. 사라의 대사가 결정적이었어. 내가 여기서 더 산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기대나 목표가 없는 상태일 때 자극에 더 취약해지는 것 같아. 그래서 목표를 가져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도 사라의 중독은 그런 기대로부터 시작이 되었잖아. 내 이상적 모습에 대한 갈구가 결국 나를 망가뜨리고 잠식해나갈 수 있다는 게 무서웠어. 나는 이상적 자아가 쩌어어어기에 있는 편이고, 그래서 자괴감도 많이 느끼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질투도 하고, 우울해하고, 그게 내 일상인데 레퀴엠을 보면서 경각심이 생겼어. 이상적 자아를 놓아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너는 그런 거 없어? 이상적 모습.

 

: 이상적 모습은 있지. 그런데 내 이상적 모습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 않나? 이상적 모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의존 상태에 빠뜨리는 것을 경계해야지. 이상을 갖는 것 자체를 경계하는 건 말이 안 맞지.

 

 : 왜!

 

: 사라는 TV에 빨간 드레스를 입고 출연하는 게 꿈이야. 꿈 자체는 잘못이 없어. 사라에게는 꿈을 이루기 위해 건강하게 다이어트를 하는 방법도 있었지. 하지만 의사를 찾아갔어. 결국 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지, 이상을 갖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야.

 

 : 그런데 이상을 갖는 순간 의존적이게 되는 거 같아. 나는 이상적인 내 모습을 생각할수록 그것에 닿으려는 마음이 생기고, 그건 가능하면 빨랐으면 좋겠고. 그런 식으로 이미 의존적이게 된달까.

 

: 이상이 있다는 건 무언가 결핍이 있다는 거고, 그 결핍을 다른 무언가로 채우면서 그것에 의존하는 거겠지. 그런 과정을 영화에서 그려냈다고 생각해.

 

 : 대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욕망이니, 결핍이니 이런 개념들을 접했던 거 같은데....

 

: 1학년 때 그런 게 있었나?

 

 : 영상학원론 안 들었니?

 

: 그거 씨쁠 받았는데.

 

 : (풉) 난 에이쁠이었는데.

 

: 좋겠네.

 

 : (...) 암튼, 누구에게나 결핍이 있는 거라면, 결국 우리 모두의 수순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꿈으로 그린 채, 지금 당장의 위안을 품에 안으며 잠들고 다시 일어나는 하루의 반복인 걸까. 그게 인생일까...!? 왜 살까, 사람은?

 

: 그냥 사는 거지 머. 태어난 김에.

 

 : (...!) 좋은 얘기네요.

 

 


 

 : 나를 지키면서 이상으로 나아간다는 건 대체 몰까? 나는 영화에서 마리온의 서사가 너무 컸어. 금단 증상을 도무지 버틸 수가 없어서, 결국 몸을 팔잖아. 지금껏 자신이 쌓아온 시간과 세계가 뒤집히는 일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얻어낸 약을 품에 안고서 잠에 드는데, 그게 정말 나에게는 너무 크게 왔어. 

 

 

 

마리온

 

 

: 난 마리온을 제일 이해하기 힘들었어. 마리온이 굳이 그런 상황에 놓였어야 했나.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는 사실 동기가 부족한 느낌이었어. 해리와 마리온이 옥상에서 이야기하는 몇 마디 정도로 마리온의 상황 설명을 끝내버렸잖아. 그래서 더 그렇게 느낀 것 같아.

 

 : 배경과 사연이 가장 흐릿한 인물인 건 맞지. 그런데 그래서 나는 더 공감이 되었어. 공감이라는 말이 조금 성급한 것 같지만... 마리온은 그 선택을 결국 자기가 했잖아. 물론 시작은 해리의 종용이었지만. 마지막엔 결국 자기가 내린 선택이었고. 그런 선택을 감당하고서라도 결코 놓칠 수 없다는 것,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런 마음이 가장 와닿았어. 마약을 껴안고, 안도하는 모습으로 끝나는 것에서도 마음이 복잡해졌고. 주인공 해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어?

 

: 해리는 자괴감을 느끼는 사람 같아. 엄마에 대한 죄책감은 있지만 TV를 팔아 당장 몇 푼이라도 구해서 마약을 해야겠는 사람. 해리는 아마 그런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그 모순을 극복하고 싶었겠고. 마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마약을 선택했을 수도 있고. 해리는 불안하거나 두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약을 하잖아.

 

 : 맞아. 불안에 대한 담력이나 면역력이 없는 상태인 것 같았어. 그런 것들을 쉽게 잊어내고 싶은 사람이 무언가에 의존하거나 중독되기 쉬운 거 같애, 그치!?!

 

: 스스로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거야?

 

 : (머쓱) 나는 영화 보는 내내 내 생각을 많이 했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런 영화를 오랜만에 봐서 좋았어.

 

 


급 마무리

 

 : 갑자기 마무리하는 느낌이지만, 너에게 레퀴엠이란?

 

: 영화가 나에게 어떤 의미냐는 뜻이야? 아니면 영화가 어땠냐는 뜻이야?

 

 : 어느 방향으로든 편하게, 한 단어로 말해 줘.

 

: 음....................... 말 그대로 레퀴엠인 것 같은데. 장송곡. 원제는 ‘레퀴엠 포 드림’이잖아. 꿈을 위한 장송곡. 마지막에 다들 잠에 드는 모양새로 끝나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관조적으로(그렇다고 딱히 막 관조적이기만 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이야기를 하면서 끝내는 어떤 장송곡.... 이라기엔 거창하고 자장가 같아. 듣다가 보면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어버리는 자장가처럼, 이 사람들은 이렇게 되는구나.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우리는 뭐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영화가 답을 주지는 않아. 그냥 ‘아…’ 하다가 스르륵, 잠드는 그런 느낌이야.

 

 : 영화에 답이나 해결책이 있었으면 이상했겠다.

 

: 있을 수가 없지. 

 

 : 장송곡, 자장가 이야기를 들으니까, 영화 서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네. 개인적으로 레퀴엠 보면서 기승전결이랄지, 흔히 갈등 후 해소가 없는 채로 되게 미묘하게 고조되었다가 그 상태로 끝나는 느낌이었어. 그래서 조금 생소하다고도 느꼈어. ‘이런 영화, 오랜만이야!’ 같은 느낌? ‘상업 영화 아니다.’ 이런 느낌!

 

: 그래도 클라이맥스는 뚜렷한데. 물론 마지막까지 계속 달려가는 영화여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는 있겠다. 결과가 참담하니까. 해소되는 느낌이 아니잖아. 나는 그런 서사를 좋아해. 해피엔딩, 베드엔딩을 떠나서 이야기를 잘 마무리지어주는 걸 좋아하지 않아. 특히 레퀴엠의 결말은 이랬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들에게 그런 길이었어, 그 길이. 별다른 갈림길도 없는.

 

 

 

 

 

 : 그럼 영화 레퀴엠을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어?

 

: 음........ 모르겠어. (긁적긁적)

 

 :  ... 그럼 언제 보면 좋을 것 같아?

 

: 겁나 우울할 때. 이열치열인 것이지. 

 

 

 


얼렁뚱땅 레퀴엠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이상을 갖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내게 있는 결핍이랄지 하는 것들을 빠르고 쉽게 해소하려 들지 말아야지. 그건 그냥 있는 내 거니까.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도 생각뿐일 테지만, 그래도 이열치열의 효과일까. 미묘하게 멘탈이 담대해진 느낌이다.

 

A가 언급한 환희(!)라는 단어가 유독 선명하게 남는다. 나도 어떤 영화들에는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는 일부러 피하기도 했다. 늙은 걸까...? 아직 젊은 A에게 좋은 자극을 받았으니, 이참에 다시금 환희를 경험하기 위해서라도 주변 사람들의 인생 영화를 알아나가야겠다. 다음에는 직장동료 J에게 인생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