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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우리의 인생 영화

2-1. [판의 미로] 환상은 어려워

 

영화의 미덕

 

 

영화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다. 단지 이야기만이 아니더라도, 카메라의 움직임과 시선, 화면이 넘어가는 속도, 그 편집. 누군가의 말소리가 화면을 채울 때, 또는 아무 말도 없을 때. 영화에는 정말 많은 시간이 있다. 그래서 종종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누군가와 1시간 반 정도가 되는 어떤 시간을 부여잡고 풀어헤치며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우리가 여기까지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영화에 겹겹이 쌓여있는 시간 덕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영화의 미덕이라 생각한다. 그 미덕을 겪고 싶을 때, 나는 이따금 말을 건다.

 

무슨 영화 좋아해요?”

 

최근에는 내 주변 지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인생 영화가 뭐예요?”

 

 


J의 인생 영화

 

 

 

지난 달 A에 이어서 이번에는 직장 동료 J에게 물었다.

 

: 인생 영화 알려 주세요.

J : 고민해 볼게요 !!

: 금요일까지 알려 주세요 !

 

그리고 일요일 오후에 J에게 카톡이 왔다.

 

J :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제가 인생 영화를 매우매우 고민을 하다가 결국 금요일에 알려드리지 못했어요!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인생영화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다가.. 저의 인생영화는 제가 좋아하는 기예르모 델토로의 <판의 미로>라고 정했습니다! 나중엔 또 변할지도 모르겠지만..!ㅎㅎ

 

그렇게 두 번째 인생 영화는 <판의 미로>가 되었다!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영화 중에 기억에 남는 건 <셰이프 오브 워터>. 2018년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보았는데, 욕실에 가득 물이 차오른 장면이 실로 인상적이었다. 관심이 생겨 감독의 전작인 <판의 미로>도 보았다. 예상보다도 훨씬 고어(...)했다. 귀를 막아야 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영화를 보다가 무서운 예감이 들면 눈이 아니라 귀를 가리는 1), 영화가 끝나고 우울감 같은 것이 내게 남은 것만 기억난다. 당시에는 <셰이프 오브 워터>에 더 시선이 갔던지, <판의 미로>가 정확히 내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가에는 그다지 골몰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냥 지나간 영화가 되었고, 이후 <판의 미로>라 하면 손바닥에 눈알이 달린 괴물만을 떠올리게 되었다(그게 전부가 아니었을 텐데!!). 그런데 이번에 직장동료 J 덕분에 <판의 미로>를 다시 보게 되었다. 조금 설렜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냉철하게(?) 영화를 보겠다는 다짐이었다. 두근두근. 그렇게 나는 귀를 막을 준비를 하며 영화를 보았다.

 

 

 

 

 

 

 

2시간의 러닝 타임이 끝나고, 나는 새삼 <셰이프 오브 워터>를 떠올렸다. <판의 미로>가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첫 내레이션이 영화 전반을 동화적인 무엇으로 만드는 힘이랄지. 눅눅하고 진득하니 바다 또는 호수 냄새가 날 것 같은 분위기랄지. 그래도 확실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는 다소간의 낭만 또는 낙관이라 일컬을 어떤 기운이 있었다면, <판의 미로>에는 없었다. 영화가 다루는 주제 자체가 비극이기 때문일 것이다.

 

<판의 미로>는 스페인의 어느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간은 1944.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5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 이들은 숲에서 싸우고 있다. 파시스트 정권은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을 곳곳에 배치한다. <판의 미로>에서는 대위가 파시스트 정권을 대표하며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다. 그리고 아내를 자신이 있는 숲으로 불러들인다. 분명히 아들일 아이는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아내에게는 어린 딸이 있다. 아내의 딸이 왼손으로 악수를 건네자 대위는 말한다.

 

악수는 오른손으로 하는 거란다.”

 

그렇게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판의 미로>의 주인공은 아내의 딸, 오필리아다. 오필리아는 책을 좋아한다. 그리고 요정의 존재를 믿는다. 메뚜기처럼 생긴 곤충을 요정이라 지칭할 정도로 담력도 세다. 그런 그녀가 새로 당도한 숲은 미지의 공간이자 공포의 공간이다. 언제나 총소리가 들리고, 사람이 무차별적으로 죽어가는 곳. 그 공포의 중심에는 새 아빠, 대위가 있다. 그렇게 공포에 떨며 잠든 오필리아에게 메뚜기 요정이 찾아온다. 메뚜기 요정은 오필리아를 미로로 이끈다. 오필리아는 그 미로의 끝에서 판을 만난다. 판은 오필리아에게 말한다.

 

저는 당신의 충실한 하인입니다, 주인님. 당신은 모안나 공주입니다. 지하 왕국 왕의 따님이죠. 공주님은 인간이 아니라 달의 자손입니다. 왕께서 공주님이 다시 돌아올 수 있게 세상 곳곳의 문을 열어놓으셨죠. 이것이 마지막 문입니다. 보름달이 뜨기 전 세 가지 임무를 끝내야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지하 왕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오필리아의 여정이 시작된다. 영화는 오필리아의 여정을 파시스트 정권시민군의 싸움과 병치하며 마지막을 향해 나아간다.

 

 


 오필리아의 환상과 마지막

 

 

 

오필리아에게 동화적 세계는 도피처인 듯하다. 지하 왕국의 공주이며, 지금은 잠시 기억을 잃고 여기에 있을 뿐,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상상. 그 상상이 낯선 숲속에서의 시간을 버티게 하는 힘이다. 그런데 나는 그 상상의 모양이 신경 쓰였다. 보통 상상이라면특히 그것이 도피를 위한 상상이라면 대체로 그 모양은 환상적이고 밝고, 좀 더 아름다운 모양일 텐데. 이를테면 내가 종종 하는 상상처럼, 멋진 무대의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는 슈퍼스타의 모습 같은 거그런데 왜 오필리아의 상상 세계는 저다지도 눅눅하고 잔인할까. 왜 벌레와 두꺼비와 괴물의 모습이지. 왜 저렇게 징그러운(?) 임무를 상상의 세계에서마저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일까. 그게 나는 계속 신경 쓰였다신경 쓰이는 점은 하나 또 있었다. 바로 영화의 마지막이었다

 

<판의 미로>는 시작부터 마지막이 분명하다. 영화의 가장 첫 장면에서부터 오필리아는 피를 흘리고 있다. 오필리아는 죽는다는 분명한 끝을 가장 처음으로 못박아두었다는 점. 그점에서 영화는 오필리아의 상상이 그래서 사실인지, 또는 오필리아가 임무를 잘 수행해내서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내는지,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저 마지막을 스포 당한 관객에게 오필리아의 여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듯하다. 이 비극의 시작이 세상을 모르는 아이의 천진한 상상인지, 다른 것인지. 파시스트 정권의 폭력을 병치시키면서 말이다.

 

영화가 내게 던지는 그 질문이 힘들었다. 특히 오필리아가 죽어갈 때 등장하는 마지막 환상이 불편했다. ‘오필리아에게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냐!’하는 마음이었다. 불편함이 감독의 목표였다면, 이 영화는 성공적인 영화일 테다. 그럼에도 나는 불편과 불쾌를 해소할 수 없었다. 보통이라면 감독의 의도가 이거였나 보다하고 넘겼을 법한데도. 나는 계속 오필리아의 마지막 환상을 반추하고 또 반추했다. 오필리아가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순간, 지하 왕국에 당도한 스스로를 상상하던 때를.

 

 

 

 

아버지 : 자신의 피를 흘려 희생했구나,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지,
판 : 지혜롭게 해내셨습니다, 공주님.
어머니 : 이쪽으로 오너라. 아버지 옆에 앉으렴,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박수 소리.)

 

 

왜 이다지도 환상적인 마지막을 오필리아에게 안겨주었을까. 폭력으로 희생된 아이들을 향한 애도이자 위로일까? 위로라면, 그런데 왜 꼭 그런 모습이어야 했을까. 너무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정작 그 환상이 오필리아에게 필요했는지도 모르는데, 이 내 마음은 대체 뭘까결국에는 영화 <판의 미로>에 대해 그 무엇도 선명하게 정리하지 못한 채로, J님과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J님에게 물어보면서 실마리를 찾아야지! 그렇게 고민을 훌훌 털어버리고 일단 잠을 잤다

 

 

 

2020/07/01 - [무한/우리의 인생 영화] - 2-2.[판의 미로] J와의 대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