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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디즈니 영화 다시 읽기

1. 나의 쓰임을 찾아 떠나는 정체 찾기의 여정, <뮬란(1998)>

 

뮬란(1998)

 

처음으로 다시 읽는 디즈니 영화는 2020년 실사판 리메이크 영화 개봉이 예정된 <뮬란>이다.

 

1998년 개봉한 <뮬란>은 디즈니 최초로 동아시아계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루며 화제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미 많은 비판이 있었던 서양인의 시선으로 구현한 중국(오리엔탈리즘)의 고증 문제는 잠시 내려놓고, 줄거리와 캐릭터를 다시 보는 일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뮬란이 입대를 결정한 이유?

 

 

뮬란이 입대를 위해 머리카락를 자르는 장면

 

 

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건설한 만리장성을 넘어 훈족의 샨유가 쳐들어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황제는 이미 갖추고 있는 군대와 더불어 싸울 의용군 징집을 명하고, 각 가문마다 남성 1명씩 징집 통지서가 발송된다. 뮬란의 파 가문의 남자는 다리가 편찮은 아버지뿐이었지만, 그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다시 갑옷과 칼을 들겠노라 집안에 선언한다.

 

당시 뮬란은 자신의 쓰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세도가로 추측되는 매파에 시집을 가려는 여성들의 테스트 자리에 나갔다가 처참하게 일을 그르치고(?) 집으로 돌아온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나라를 지키고 여자는 사내를 낳으며 가문과 나라의 영광을 드높이자는 동네의 분위기 속에서 '괜찮은 신부'가 될 수 없었던 뮬란은 여자의 유일한 역할 수행에 부적격 판정을 받은 셈이었다.

 

물 속의 자신의 얼굴을 보며 뮬란은 자신은 이 낯선 (여자의 역할로 화장한) 모습이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고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면서 명곡 Reflection을 열창한다. 사실 이 노래를 부를 정도의 가창력이라면 진즉에 가수 쪽을 생각해볼 만도 했지만 여성의 성역할이 고정되어 있는 당대 사회에서 예체능은 필연 사농공상에도 끼지 못하는 천민의 일이었을 터. 가문의 영광을 중요시하는 파 가문에서는 선택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여차하여 입영통지서를 받은 아픈 아버지를 대신하여 뮬란은 결단을 내린다. 모두가 잠든 비오는 밤 가문의 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검은 말(칸)을 타고 훈련소로 떠난다. 이 과정에서 다시 읽을만한 포인트가 하나 나온다. 바로 아버지의 모습이다.

 

 

 

 

주인공은 부모를 잃거나 떠나면서 성장한다. 앞으로 다시 읽을 디즈니 서사들에서도 반복될 법칙이 <뮬란>에도 등장한다. 피지 않은 꽃 이야기를 하며 딸을 위로하던 아버지는 밤중에 자신을 대신에 입대한 딸이 떠난 자리를 보며 처음에는 황망해한다. 어머니가 뮬란이 행여 전쟁에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따라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대사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어차피 여자인 정체를 들켜도 죽게 되어있다." 그러면서 주저 앉아 처량히 비만 맞는다. 디즈니 영화의 플래그를 따라간 어쩔 수 없는 행동이긴 하나 집에 하나 있는 자식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은 아닐는지, 여권이 바닥인 배경을 참작하고라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 줄 건 주는(?) 이 장면은 생각이 머무는 장면이었다.

 

한편 선조를 모시는 사당에서는 조상님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한다. 명절 친척 모임 분위기로 의중이 뻔한 이야기들, 이를테면 저 애는 누굴 닮아서 그럴까! 하는 비야냥이 오가는 화기애매한 분위기 속에서 어쨌거나 가문의 명예를 위해 출정을 나선 뮬란에게 수호신을 붙여주자는 안건을 나눈다. 과거에는 수호신이었지만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모종의 사건으로 지금은 지위를 박탈당한 붉은 용 무슈는 선택된 다른 수호신을 깨우다가 박살 내버리는(?) 사고를 친다. 본의 아니게 본인이 뮬란을 서포트하고 수호신 복권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행운의 귀뚜라미 귀똘이와 함께 뮬란의 여정에 참여하게 된다.

 

 

무슈와 귀똘이

 

 


2. 훈련소 입소부터 첫 출진까지

 

 

 

시범을 보이기 위해 항상 윗도리를 벗는 캡틴 샹 

 

 

뮬란은 핑이라는 가명으로 훈련소에 입소하고, 장군의 아들 리 샹은 3주간 오합지졸 병사들을 훈련시키라는 명을 받아 지휘관으로 등장한다. 첫 등장부터 얘가 남주겠구나 싶은 비주얼의 캡틴 샹은 긴 장대 끝에 화살을 박아 놓고 양 팔에 쇳덩이를 든 채로 뽑아올 것을 부하들에게 명한다. 정작 본인은 시범을 보이거나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는 일로 부하들의 기-썬을 제압하며 훈련을 시작한다.

 

그들의 훈련은 예비 병력의 군사 훈련이라기보다는 실미도에 갇힌 북파공작원 양성 훈련에 가까워보였다. 영화 초반에 황제가 지시한 전국의 백성 징집령에 비하면 뮬란을 포함해 의용군 15인 + 캡틴 샹 + 황제의 보좌관 치푸까지 17명의 소규모 그룹이기에 그러한 인간 병기 훈련이 연출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훈련을 마치고 출진을 기다리는데 상부에서 병사들이 필요 없을 것 같다는 오더가 내려온다. 허나 이대로 군대가 해산된다면 이야기 진행이 되지 않을 터. 무슈와 귀똘이가 공문서 위조를 통해 치푸에게 지원 요청이라는 내용이 담긴 가짜 전갈을 전하며 17인 특공대는 비로소 전장으로 나서게 된다.

 

 

 

 

전쟁터로 가는 길. 전에는 보지 못했던 다시 읽을만한 장면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무슈였다.

 

디즈니의 영화라면 동물이든 피조물이든 귀여운 조연 친구들이 함께하기 마련이다. <겨울왕국>의 울라프와 스벤처럼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여행에 도움을 주는 친구들부터 <라푼젤>의 카멜레온처럼 귀여움만으로 영화를 압도하기도 한다. <뮬란>에서의 무슈의 역할은 굳이 분류하자면 조력자 포지션이다. 영화의 긴장감을 이완시키며 재미를 주는 개그캐이기도 하다.

 

허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무슈는 뮬란의 깊은 고민, 성역할의 고착에 한 몫한 인물이었다! 훈련소에서 뮬란은 무슈의 조언에 따르며 '남자라면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들을 행한다. 이를테면 가래침 뱉기, 엉덩이 발로 차기, 친근감의 표시로 얼굴에 주먹 꽂기' 같은 일들. 이는 힘으로 서로의 서열을 확인하는 남성상을 전제로 하는 행동이다. 

 

무슈의 문제 장면은 바로 출정 중에 병사들이 자신의 이상형(여성)을 부르짖는 노래에 나타난다. 무슈는 논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보이자 휘파람을 분다. 이는 일종의 캣콜링으로 인상이 짜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뮬란은 병사 훈련을 하는 동시에 남성의 성역할로 재사회화의 과정을 겪는다. 무슈로 치환된 중국남성이 이끄는 남성 사회화 작업의 목적지는 '상위권 남성'으로 보인다. 힘과 명예를 얻어 권력자로부터 인정을 받고, 더 많은 돈과 땅과 여인을 지배하는 상위 포식자가 되는 일. 그것이 전쟁 승리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효심, 가문의 명예 등으로 명분을 세웠지만 뮬란이 선택한 여정의 목적은 Reflection에서 드러난 '정체 찾기'의 과정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에서 탈락했지만, 자신의 쓰임을 발견하고 성장해가는 서사가 조력자의 속된 말로 빻은 방향성 때문에 퇴색되는 면이 없지 않아 보였다. 아마 실사화 리메이크 과정에서 많이 염두에 두었을 포인트는 '성 역할'이 아닐까 싶다. 견고한 과거 중국 배경에서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걸어보며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연한 것'이 사실 당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돌을 던지는 일. 과감하게 유리 천장을 뚫고 실력만으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쓰임을 찾아가는 뮬란의 여행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3. 전장의 지배자 뮬란

 

 

수천 대군 앞에서 웃을 수 있는 1류의 모습

 

 

산 넘고 물 건너 도착한 마을은 이미 흔적도 없이 폐허가 되어 있었다. 리 샹의 아버지인 장군과 그의 병사들을 모두 전멸한 상황이었다. 외려 무슈와 귀똘이의 공문서 위조가 없었다면 적장 샨유의 진격을 저지할 수 없는 위기의 순간인 것. 캡틴 샹과 특공대원들은 훈족이 궁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고자 진격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설산을 넘는 중에 샨유와 훈족의 수천 병사와 마주하게 된다.

 

일회용 화포로 위협 사격을 하나 수적 열세로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고, 17인 특공대는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로 항전한다. 캡틴 샹은 적장 샨유에게 직격으로 쏘기 위한 단 한 발의 화포를 남겨두었다. 허나 뮬란은 기지를 발휘해 화포를 샨유가 아닌 설산에 쏘아 눈사태를 이끌어 대군을 몰살시킨다(?)

 

 

뮬란님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상대에게 배를 칼로 베였음에도 신들린 에임으로 대승을 이끈 뮬란이었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그의 성별이 여성임이 밝혀진다. 뮬란은 큰 활약에도 불구하고 군법에 의해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캡틴 샹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그를 처형하지 않고 설산에 두고 병사들과 떠난다. 어떻게 보면 아무도 없는 설산에 부상자를 홀로 두고 내려온 것이 좋게 말해 기회를 준 것이지 사실상 죽음에 방치한 것은 아니었을는지 생각해본다.

 

뮬란은 또 한 번 '자신의 역할'에 대해 좌절하고 만다. 여자라는 이유로 적진을 혼자 다 쓸어버리고 나라를 구한 영웅임에도 그는 버림받고 말았다. 이에 슬픔이 전염되어 자신이 수호신 대타라며 고백하는 무슈와 실은 행운의 귀뚜라미가 아니라고 자책하는 귀똘이까지 동시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며 슬퍼하는 와중에 피이익- 하는 매 소리에 뮬란은 정신을 차린다. 궤멸된 줄 알았던 훈족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이 소식을 전하려 말을 타고 궁으로 달려간다.

 

허나 캡틴 샹은 한 번 나간 삔또를 수습하지 못하고 뮬란의 말을 듣지 못하다가 황제를 샨유에게 빼앗기고 궁을 점거당하고 만다. 한 나라의 황제가 호위군도 없이 한 줌의 군사(17인 특공대)만 있다는 점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여차여차 액션씬을 지나 황제를 구출하고 비단 여자지만 대단한 공을 세운 뮬란에게 직위를 봉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4. 나가며

 

 

주인공이라 말도 타고 지휘관보다 앞서 달리는 패기를 부릴 수 있음

 

20여 년 전 영화임을 감안하면 '여성 주인공 + NO 로맨스'라는 앞서간 서사를 보인 작품이다. 다만 조연이 주인공의 서사를 퇴색할 수 있다는 뜻밖의 교훈을 준 작품이기도 했다. 여전히 유리천장과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서 2020년 리메이크로 다시 태어날 뮬란의 모습은 어떠할까? 그의 정체 찾기를 따라가며 나 또한 쓰임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되었다. 사회가, 세상이 바라는 기준에 맞춰 나 자신도 모르게 돌을 던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는지.

 

다시 Reflection 하며 당당하게 세상에 맞서 보자. 본의 아니게 시작된 여정이었을지어도 용기와 능력으로 극복해낸 뮬란의 이야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