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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디즈니 영화 다시 읽기

4. 애매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아나스타샤(1997)>

아나스탸샤(1997)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야기의 지엽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다룹니다.

*폭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었으나, 2017년 디즈니가 21세기 폭스사를 인수했기에 디즈니로 포함시켰습니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디즈니 프린세스에는 포함되어 있지는 않네요!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0. 아나스탸샤

 

때는 일천구백십육년, 제정 러시아는 원스 어폰 어 디쎔버에 혁명으로 붕괴되고 뒤이어 쏘ㅡ련이 등장하게 된다. <아나스타샤>로마노프 족의 마지막 핏줄 아나스타샤의 이야기이다.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와도 겹쳐 보이는 이 이야기는 실존인물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잠깐 역사적 배경을 훑어보면,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슬하에는 1남 4녀가 있었는데, 그중 4녀이자 막내딸인 인물이 바로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이다. 공식적으로는 1901년 출생,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차르 일가 처형 때 함께 사망으로 기록되어있으나, 아나스타샤만은 처형되지 않고 위기에서 빠져나왔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유사 아나스타샤들이 등장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영화 <아나스타샤>는 폭스사의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고 수작이긴 하지만,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차르 일가를 미화하고 러시아 혁명을 왜곡했다는 평도 받았다. 앞으로의 리뷰는 영화 외적인 맥락보다는 영화가 그리는 세계에 집중해서 풀어갈 예정이다. 모두가 영어를 쓰는 로씨아, 모두가 아나스테이샤라고 부르는 아나스타샤의 발음은 조용히 넘어가 주자.

 

 

1. 앵그리 라스퓨틴

 

시종일관 빡쳐있는 라스퓨틴,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빡쳐있음

나라가 망조가 들면 왕권에 어중이떠중이들이 들러붙어 조정을 갉아먹는 건 세계 어느 지역이건 보편적인 설정인 듯하다. 특히 종교와 결탁한 사이비계열맨들이 이름을 크게 날리는 경우가 많은데, <아나스타샤>의 제정 러시아에는 어중이떠중이 킹 라스퓨틴이 있었더랬다. 애석하게도 러시아의 신돈이 될 수는 없었지만, 화려한 언변과 통치세력과의 결탁으로, 보니엠의 노래로 까지 남은 대스타 라스푸틴을 모티프로 했을 이 캐릭터는 이름이 주는 아우리와 맥락은 사라진채로 시종일관 화가 나 있다.

 

그가 읊는 대사는 시종일관 황족놈들 때문이야! 복수할 거야! 가 8할일 정도로 매우 빡이쳐있는데, 자신과 결탁하던 황족에게 뒤통수를 씨게 맞은 모양이다. 작전주식 정보라도 받아 평생 모은 돈을 일시에 날렸을까, 자신의 육신을 악마에게 넘기고 초록색 요술봉이랑 바꾸는 언데드 계약을 맺는다.

 

혁명은 라스퓨틴의 무도회장 습격으로 시작한다. 로마노프 놈들 다 죽어!라는 킹저주를 퍼부으며 깽판을 놓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은 일시에 함락당한다.

 

2. 목걸이와 펜던트

아냐스테이샤의 목걸이를 집중해주세요!

 

라스퓨틴이 들이닥치기 직전 왕의 어머니, 한국으로 치면 대비마마는 자신의 손녀 아나스타샤를 아껴, 목걸이와 펜던트 세트를 선물한다. 펜던트는 일종의 오르골로 목걸이를 껴서 태엽처럼 돌리면 춤추는 로씨아 인형이 나오는 구조다. 고구려의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치며 유리가 크거든 이 부러진 검을 갖고 오라고 하시오! 하며 남기고 간 파츠처럼, 영화 초반부터 깔아주는 복선은 저것이 실마리가 되겠구만! 하는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목걸이에 적힌 파리에서 만나요.라는 문구도 마찬가지다. 할머니와 손녀는 영혼의 듀엣 공연을 이어간다. '원스 어폰 어 디쎔버'는 여느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멋진 OST다.

 

아나스타샤는 복선 회수력으로는 디즈니 작품(폭스사 인수 기준) 중 손에 꼽히는 플롯을 가졌다. 전반부의 한 장면 한 장면이 회수되고, 뮤지컬 씬에 나오는 인물도 스쳐 지나간 조연들을 활용하며 세계를 쫀쫀하게 잡아놓는다. 다만 철저하게 공주 서사의 문법에 따르는 모범답안 같은 흐름은 엄청난 임팩트를 주지는 못하기에 일장일단이 있다.

 

 

3. 공주 서사의 문법

애완동물 푸카, 도적놈 1 블라드, 아나스테이샤, 도적놈 2 드미트리

 

1. 부모가 없거나 제 역할을 못해 혼자 극복해나간다. 근데 애완동물은 함께한다.

2. 도적놈/사기꾼/짐승 등 파트너의 출신 성분이 안 좋다.

3. 자아를 찾아야 이야기가 끝난다.

 

러프하게 잡아도 대부분의 공주 서사가 걸려드는 세 가지 규칙을 <아나스타샤>도 지킨다.

 

1. 로씨아 혁명으로 아나스타샤는 8세에 혼자가 되고, 길에서 헤매는 그를 고아원에서 거두어 성인으로 성장한다. 18살도 되었으니 목걸이의 계명을 따라 프랑스로 가는 와중에 하늘의 신호처럼 강아지 푸가가 등장하여 같이 동행하게 된다.

2. 프랑스 가는 기차표를 찾다가, 대비마마가 아나스타샤를 찾는다는 말에 오디션을 봐서 가짜 손녀로 한탕해먹으려던 사기꾼 드미트리를 만난다.

3. 그와 동업자 블라드와 함께 황족 뿌리 찾기 어드벤처를 떠나며, 나는 누구일까. 나의 사라진 유년시절은 무엇일까.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자아 찾기에 집중한다.

 

나다운 게 뭔데? 혼란을 겪다가 사랑을 택하는 여타 공주들처럼 아나스타샤도 역경을 함께한 도적놈을 선택할 것인가? 결말은 직접 확인하길 권한다.

 

 

4. 부족한 ㅇㅇㅇ

 

내용이야 어쨌든 화면이 정말 아름다웠던 파리의 연인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뮬란(1998), 포카혼타스(1995) 등에 비해 아나스타샤는 상대적으로 우리네 기억에 덜 남아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세 가지 부족함때문 아닐까 싶었다.

 

 

 

프랑스에 사는 대비마마

 

먼저, 부족한 명분이다. 벨이나 애리얼이 보여주는 종을 뛰어넘는 사랑의 힘, 뮬란이 보여주는 신분제/젠더 권력 극복, 포카혼타스의 평화와 자연보호의 가치와 같은 보편적이지만 직관적인 명분이 부족하다.

황족이 쿠데타로 모든 걸 잃었지만 프랑스로 도주해 잘 살고 계시는 대비마마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극적으로 포장해도 계급주의 옹호 밖에는 안되기 때문이다. 모험과 역경을 통해 드미트리와의 러브라인을 엮는 과정도 보이지 않는 언데드 라스퓨틴이 원거리 공격만 하는 통에 임팩트가 덜하고, 자아 찾기도 결국 신분이냐 도적놈과의 사랑이냐 이분법으로 귀결되기에 아쉬웠다.

 

멍!

 

두 번째는, 부족한 귀여움이다. 강아지 푸가가 온 힘을 다해 귀여움 포인트를 올렸지만, 존재감이 미미했고 악역 라스퓨틴 군단의 비호감이 모두 점수를 까먹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라이온 킹의 스카가 비프리페얼드 하며 하이에나 군단을 소집할 때는 얼빠진 표정의 애드가 무서움을 중화시키며 익살스럽게 장면을 포장했기에 멋있게(?) 표현되었다. 하지만 얼음물에 빠져 지하에 10년간 갇혀있던 설정의 라스퓨틴은 썩은 시체의 특성상 신체절단이나 뼈가 드러나는 혐오스러운 묘사가 많고, 그를 보좌하는 박쥐와 벌레들이 노래 부르는 모습은 진지하게 빡쳐서 복수하는 감정은 있지만 유머는 부족했다. 그런 악역 게이지에 비해 전투력이 너무 약한 것도 좋게 평가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상영시간이다. 90여분에 담기엔 긴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오에스티, 특히 미국계 로씨아인들이 영어로 부르는 뮤지컬 씬이나 대비마마와 아나스타샤의 원스 오픈 어 디쎔버 듀엣은 너무나도 좋다. 다만 그런 장면 장면의 좋음이 이야기 전개를 위해 스킵하며 넘어가는 내용들로 여운을 느끼기도 전에 급하게 넘어갔더랬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폴란드를 거쳐 독일 찍고 배 타고 파리로 가는 수십일의 일정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요즘이야 2시간넘는 영화가 쎄고쌨지만 그 당시 트렌드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잃어버린 역경과 모험의 시간만 복원해도 드미트리와 아냐의 명분은 채워지지 않을까 싶었다.

 

아메리카 그레이트 어게인 하는 대통령 재임기간 + 역사 왜곡을 하며 뮬란을 말아먹은 작금의 디즈니가 당장은 아냐스타샤를 건드리지는 않겠지만, 장면들이 아름답고 선악의 구도도 확실하기에 언젠가 각잡고 각본을 고쳐서 실사화를 한다면 꼭 보고 싶을 애니메이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