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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디즈니 영화 다시 읽기

5. 벨의 기구한 인생과 세 명의 원흉들, <미녀와 야수(1991)>

미녀와 야수(199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야기의 지엽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다룹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1. 오늘도 평화로운 프랑스계 미국인들의 마을

오늘도 평화로운 프랑스계 미국인들의 마을

봉쥬르!

첫 음악이 흐르고, 마을 사람들은 '봉쥬르'라고 인사한다. 이곳은 프랑스계 미국인들이 거주하는 마을(아닙니다). 책을 좋아하는 벨은 오늘도 서점에 책을 빌리러(?) 간다. 휴대폰도 전기도 없어 보이는 깡촌 마을, 똑똑한 여성/책을 읽는 여성은 배격당하는 게 일상이다. 사람들은 벨을 괴짜라고 평하고, 그의 미친 발명가 아버지와 묶어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만 원제인 Beauty and the beast에서도 알 수 있듯 벨은 이야기 속에서 상당한 미인으로 평가되고, 얼굴은 예쁜데 하는 짓은 ㅉㅉ... 하는 얼평과 오해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지혜로운 벨의 역량을 고려해 한국식으로 풀어내면, 나는 아빠처럼 살지 않을거야! 지긋지긋한 시골! 나는 서울로 갈거야! 하는 상경 서사 & 여성 성공 서사로 이어질만도 하겠지만. 애석하게도 벨에게는 그의 인생을 옥죄는 세 명의 남성이 있었더랬다. 그가 능동적으로 삶을 펼쳐보기도 전에 통제할 수 없는 판을 깔아버리는 세 명의 양남들. 오늘은 <미녀와 야수> 플롯을 벨의 입장에서 재구성해보려 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인생>만큼이나 박복한 벨의 남복과 팔자는 어떤 곡절 끝에 해피 엔딩에 닿을 수 있을까?

 

 

2. 원흉 1 : 왕자(a.k.a 야수)

옛날 옛날에 버르장머리 없는 잼민이 왕자가 살았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교회에서 볼법한 스테인글라스로 표현된 옛날 이야기로 시작된다. 내용인즉슨 옛날 옛날에 인성에 문제가 있는 왕자가 살았고 어린 시절부터 오냐오냐 모먼트로 키워졌기에 지 하고 싶은대로 난폭하게 행동했더랬다. 어느 비가 오는 날 한 노파는 비를 피할 겸 하룻밤만 묵고 갈 수 있겠느냐며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넸고, 왕자는 Nope이라고 칼답을 하고 문전박대를 했더랬다. 알고보니 노파는 왕자의 인성을 테스트한 요정이었고, 그는 뒤늦게 빌어보았지만 저주를 하사받고 야수가 되어버린다. 저주에는 타임리밋 추가 발동 조항이 달려있었다.

 

"스물 한 살 생일이 지나기 전에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면 죽는다'

 

문제는 이 저주가 광역 마법이었기에 연대책임으로 성에 사는 집사와 하인들도 함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촛대, 시계, 컵, 옷장 등 인성 터진 주인놈 때문에 여러 사람이 고생하는 설화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편, 왕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올라가보자. 사람들이 성으로 쳐들어와 야수가 큰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장미꽃의 마지막 잎이 떨어지는 순간, 그 시간이 스물 한 살 생일이 되는 시점일 게다. 리얼 타임에서 야수(왕자)의 나이는 21세라면 언제부터 저주는 시작되었을까? 바로 <미녀와 야수> 최고의 OST 중 하나인 'Be Our Guest'에 그 힌트가 있다.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Ten years we've been rusting
십 년동안 우린 녹이 슬고 있었죠.
Needing so much more than dusting
먼지만 털고 있는 것 이상이 필요했어요.
Needing exercise, a chance to use our skills!
연습이 필요했어요, 우리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그간 성에는 이렇다할 손님이 없었다는 루미에(촛대)의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저주로부터 대략 10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말이다. 왕자는 대략 10~11세 잼민이 시절에 저주를 받았고 그때부터 성에 짱박혀 야수로서 2차 성징을 겪으며 홀로 성장했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조금 가혹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후 행보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대목은 원흉 2와의 접점에서 이야기를 더 이어가겠다.

 

 

3. 원흉 2: 모리스(a.k.a 아버지)

매드 사이언티스트 모리스

이야기의 근본 원흉이 왕자의 몫이라면, 벨이 사건에 휘말리게 만드는 건 모리스의 공이 크다. 벨의 아버지인 그의 직업은 발명가이다.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 이혼일지 사별일지 혹은 입양일지 알 수는 없지만 한부모 가정의 가장인 그는 가족보다는 꿈을 쫓는 남자다. 옆 마을에서 펼쳐질 발명 콘테스트에 나가기 위해 밤낮으로 장작패는 자동화 기계 연구에 몰두하던 그는 시운전에 성공하자 출품을 위해 필립(말)을 타고 목적지로 향한다.

 

한참을 가던 중 날은 어두워지고, 숲 속에서 길을 잃은 그는 안전해 보이는 길을 거르고 구태여 개위험해보이는 지름길을 고집한다. 그리고 개과 동물인 늑대친구들을 만난다. 도망치던 모리스와 필립은 낭떠러지 앞에서 몰리고, 이성의 끈이 끊어진 필립은 귀소본능을 발휘해 집으로 냅다 달린다. 낙마한 모리스는 방황을 하다가 문제의 발단, 야수의 성에 들어가게 된다.

 

헬로우- 거기 누구있나요? 비도 오고 밤도 늦었는데 좀 묵고가도 되나요? 하면서 들어갔다가 루미에(촛대), 콕스워스(시계), 미세스 팟(주전자), 칩(잔) 등 각종 도구 친구들에게 환대를 받으며 벽난로에서 몸을 녹인다만 이는 명백한 주거침입이었기에 야수에게 발각되고는 즉결 심판으로 성 안의 감방에 갇히고 만다. 도구 친구들과 대화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상상력의 여지가 있는 양반이었기에 야수와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위에서 확인했듯 야수는 피해의식에 쩌들어 10년째 집에만 있는 히키코모리 잼민이였기에 소통이 불가능했다.

 

아버지가 사라진 후 필립만이 집으로 돌아오자 벨의 머리 속에 있는 '효녀벨 버튼'이 눌린다. 단 하나 뿐인 혈육을 구하겠노라며 말을 타고 가서 하는 일은 협상이었다.

 

벨 어서오고

아버지를 풀어주고 내가 인질로 잡히겠다고 선언한 벨. 야수는 딜을 바로 받아들이고 모리스를 밖으로 내친다. 벨의 기구한 인생의 스타트는 못난 아버지의 빚을 값기 위해 짐승과 함께 살아야하는 조건에 처하게 된 것이다. 야수 또한 아저씨보다는 젊은 여성인 벨을 선택한 것이 노골적이다. 자신의 저주를 풀기 위한 성적 대상으로 선택을 한 것이고 여기에 벨의 의사는 1도 반영되지 않았다. 

 

때문에 벨은 야수의 명령도 환대도 거절하고 다소 황당한 도망 & 늑대에게서 구해주기라는 플롯을 통해 라뽀를 쌓게 된다. 혹자는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보기도 하고, 벨이 금지된 서쪽의 탑에서 찢겨진 왕자 시절 초상화를 보고 견적을 냈다는 의견도 있지만 나는 체념의 정서가 개입된 것으로 보았다. 늑대로부터 구해줬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도망친 자신을 미행하면서 따라왔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못난 양남 둘 때문에 인생이 이상하게 꼬이는 와중에 최악의 원흉3이 개입한다.

 

 

4. 원흉 3: 개스톤

망나니 오브 망나니 개스톤

바로 프랑스계 미국인 마을 최고의 양아치이자 망나니 개스톤이다. 아무리 마을에서 개판을 치고 후레자식 짓을 하더라도 잘생긴 개스톤, 멋진 개스톤 이 지랄로 오냐오냐 하다보니 돌이킬 수 없는 상놈이 되어버렸다. 애석하게도 저주를 내리는 요정은 평민에게는 안 오는 모양이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매력을 가진 벨에 꽂힌다. 그녀를 자신의 와이프로 삼겠노라며 여러 가지 작전을 짜기 시작한다. 그 중 단연 최고의 극혐 작전은 '프로포즈 사건'이다. 그는 우선 양복을 차려입고 벨의 집 앞에 야외 결혼식 세트를 차려놓는다. 벨을 데리고 나오자마자 졸속으로 결혼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상습 스토킹 + 고자세 양남질을 과장된 캐릭터로 묘사한 듯 하나 대사 하나하나가 정말 주옥같다. 벨의 집에 간 그는 흙발로 남의 집 테이블에 발을 턱 올려놓더니 장화를 벗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과 결혼할거임
내가 사냥하고오면 발마사지해줄 여자가 필요함ㅎ
애는 여섯-일곱정도면 좋겠네ㅎ

 

어림도 없는 쌉소리를 지껄이는 개스톤을 벨을 지혜롭게 쫓아낸다. 거절의 상처는 개스톤에게 크게 남는다. 그렇게 흑화하여 너를 내 여자로 만들겠어! 라며 두번째 작전을 준비한다. 벨은 돌아온 필립을 보고 급작스럽게 아버지를 찾으러 떠난 사이, 그는 매드사이언티스트이자 예비 장인이 될 모리스를 정신병원에 보내고 다시 졸속으로 결혼하는 구상을 꾸민다. 하지만 어림도 없이 야수가 벨을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와중에 벨은 야수와의 관계가 돈독하게 형성되고,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보고싶다는 휴가 제안을 한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야수는 마법의 거울과 함께 선뜻 보내주고, 복귀하는 길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바로 개스톤의 예비 장인 정신병원 보내기 작전이었다. 모리스는 자신의 딸이 야수에게 잡혀갔다고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나 '야수'라는 말에 더더욱 미친놈 취급을 받는다. 벨이 집에 돌아와 짧은 재회를 하는 찰나 정신병원 관계자들과 개스톤의 무리는 모리스를 잡으러 온다. 벨은 야수는 진짜 있다고 증명이라도 하듯 마법 거울을 보여주지만, 망나니 개스톤의 생각 회로는 이상하게 흘러버린다.

 

수렵시대에 힘의 우위를 공적을 세우거나, 마을의 위험 요소를 제거하면서 세우듯 그는 '야수를 처치하면 내가 짱이 되고, 벨도 취할 수 있다'는 기적의 논리를 세워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50인의 남성으로 구성한 시민 방범대를 구성해서 야수의 성으로 출정을 떠난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야수와 도구 친구들에게 개썰리고, 개스톤은 야수에게 치명상을 입혔지만 타이밍 계산을 실패해서 성 아래로 추락해버리고 만다. 

 

5.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아버지 이제 집에가세요.

한 여성의 인생이 단 90분 안에 수많은 평가와 잣대들뿐 아니라, 스토킹과 미행, 아버지 뒤치닥거리, 인신매매, 생명의 위협까지 다채롭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미녀와 야수>. 내 머리 속에는 아름다운 노란색 드레스와 댄스만 남아있었지만 볼 수록 뜨악했던 이야기였다. 미화하지 말고 직시하면서 재평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IF로 이야기를 끝내려 한다.

 

사람들이 벨을 내버려두었다면, 아버지가 사달을 만들지 않고 야수나 개스톤이 벨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벨은 좀 더 능동적인 선택들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나저나 눈치 없이 끝까지 벨 곁에 남아있는 아버지 얼른 집에 보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