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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누워서 세계속으로

1화 <굿바이 레닌> : 독일의 현대사를 가족사에 담아낸 수작

 컨텐츠를 시작하면서 첫 영화를 무엇으로 할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영화 목록을 뽑으면서 내가 놀랐던 두 가지는, 다양성을 추구했다고 생각했던 나도 영화 평가 앱 <왓챠>의 통계에서 미국/한국/일본 영화의 비율이 90%를 넘는다는 것 하나, 두 번째는 한국어/영어/일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대사가 있는 영화도 다행히 오십 편 이상은 된다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나는 첫번째로 독일영화 <굿바이 레닌>을 골랐다. 나의 독일에 대한 애정(?)도 투영되고 멋진 독백들이 기억에 남는 영화 였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20세기의 큰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기획의도와 잘 맞아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여튼! 영화의 초반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다.

 

1978년, 동독에 사는 주인공(알렉스)은 어렸을 적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서독으로 도망갔고, 엄마는 충격에 빠져 실언증을 앓았다가 회복된 뒤에는 열성적인 공산당원으로 활동한다. 10년이 흘러 1989년, 그는 TV수리 회사에 다니며 낡은 동독에 대한 것을 싫증 내는 청년이 됐다. 어느 날, 반 정부 시위에 참가하다가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엄마의 눈에 띄게 되고, 아들이 경찰에게 끌려가며 곤봉으로 맞는 모습을 본 엄마는 충격을 얻고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6개월의 코마 기간 동안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국경이 개방됐지만 알렉스는 다시 눈을 뜬 엄마때문에 고민에 빠진다. 다시 한 번 큰 충격을 받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경고를 듣고, 거동이 불편한 엄마를 집 방 한 칸에 (가둬)두고 주변사람들을 동원해 아직 변화가 되지 않았다며 거짓말 연극을 시작한다.

 

유독 우리나라의 영화 프로그램에서는 이 영화를 우리나라의 상황과 대치시키곤 했는데, 나는 이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동서독이 갈라진 것처럼 남북한도 나누어져 있지만, 두 나라의 상황에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본 떠 만든 <간 큰 가족>이라는 한국영화도 결국 나왔고 유수의 프로그램에서 두 영화를 같이 다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는 오직 이 영화의 배경과 서사에 대해서만 다뤄보려고 한다.

 

주인공으로는 마블 팬들에게 '제모'역으로 익숙한 다니엘 브륄이 나온다.

 


1. 냉전시대의 축소판

 

첫 해외여행으로 독일을 갔을 때 베를린을 방문했었다. 베를린 곳곳에는 끊어진 장벽들이 있었는데, 분단 초기에는 이 장벽을 몰래 넘다가 발각되어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곳곳에 그들의 이름을 써놓고 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영화에서처럼 알렉스의 아버지가 서독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여했다는 대화도 들을 수 있고, 비슷한 시기의 독일을 다룬 영화 <타인의 삶>에서도 서독의 신문기자가 국경을 오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일부만이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었고, 동독은 주민들을 끊임없이 통제하고 억압했다. 이웃이 이웃을 도청하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동독에서는 사상 주입과 함께 서독으로의 망명을 막았다. 80년대 후반으로 흘러가면서 냉전은 끝나갈 조짐이 보였지만, 아직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동독의 이미지는 어린 알렉스가 TV를 보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표현된다. 동독 최초의 우주비행사 ‘지그문트 얀’은 소련의 우주왕복선을 타고 우주로 나가는데, 60년대부터 자본주의를 표상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표상하는 소련이 우주탐사 경쟁을 벌인 것을 생각해본다면 동독은 소련의 사상을 따르는 곳이라는 것이 연상된다.

 

또한 중요한 것은 TV밖에서 일어나는 알렉스에게 닥친 현실이다. 엄마는 동독경찰에게 취조를 받는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 여성에게 빠져 서독으로 나간 아버지에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시점에서 알렉스에게 자신을 버린 아버지는 ‘서독=자본주의=미국’으로 연결되고, 이제 없어진 아버지의 대안으로서 알렉스는 ‘지그문트 얀=동독=사회주의=소련’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이제 알렉스는 우주인이 되기를 꿈꾸고, 열성당원 어머니와 남은 유년시절을 보낸다. 아버지는 불문율이 된 채.

 

 

열성당원으로 아이들을 지도하는 알렉스의 엄마 크리스티아네

 


 

2. 동서독의 차이

 

동독와 서독은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비교된다. 우선은 물건과 상표. 서독은 ‘코카콜라’와 ‘이케아’ 그리고 ‘버거킹’으로 대변된다. 한편 동독은 그곳 출신이 아니면 모를 ‘스프리발 피클’ 또는 ‘모카 픽스 골드’로 표현된다. 이것들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고, 구할 수 없다. 누군가가 버리고 간 집의 천장에서 먼지를 뒤집어 엎은 채 있거나 쓰레기통을 뒤져야 한다. 마트에서는 동독 제품의 자리를 네덜란드에서 만든 피클이 대체하고 설 자리를 잃는다. 그리고 동시에 알렉스의 옆집 할아버지를 비롯한 주변사람들은 실업자가 된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알렉스가 서독에 처음 갔을 때, 동독사람들은 서독에서 파는 개방적인 포르노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한다. 엄마가 입원한 병원의 간호사였던 라라와 함께 간 데이트 장소에는 기괴한 벌레 가면을 쓴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하지만 쓰러지기 전 엄마는 그 대척점에 서서 사람들의 옷차림을 검열하고, 다양성을 죽인다. 아이들은 같은 옷과 빨강색 스카프를 하고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임산부는 화려한 옷을 입으면 안된다.

 

비유는 집안에서도 이어진다. 아버지가 서독, 엄마가 동독이라면, 아들인 알렉스는 동독, 누나 아리안느는 서독으로 표현된다. 알렉스는 소련에서 동독으로 교환학생 겸 간호사로 온 ‘라라’와 커플이 되지만 누나는 국경개방 후 버거킹에 취직하고 서독 남자와 동거를 시작하며 동양문화에 심취한다. 알렉스가 엄마를 속이기 위해 동독의 물건을 모으는 동안 누나는 자신이 예전에 입었던 옷을 보며 ‘이렇게 촌스러운 걸 어떻게 입었지’라고 말한다.

 

버거킹에서 만난 누나와 동거남의 모습

서독은 환율에선 2대 1로 앞섰고 축구에선 1대 0으로 이겼다.

 

영화 내에서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이 독백은 독일사람들이 열광하는 축구와 동서독의 사회체제 차이로 인한 경제적 규모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필연적 운명처럼 동독은 경제에서 밀린 모습이고, 유럽인들에게는 자존심과도 같은 축구에서도 밀린다. 알렉스는 기한이 끝나기 전에 돈을 교환하려고 해보지만, 엄마는 돈의 위치를 기억하지 못한다.
후에 버린 가구 서랍에 돈이 있다는 것을 엄마가 알려주고 은행에 가지만 이미 교환은 끝나버렸고 돈을 바꿔주지 못한다는 창구 직원에게 알렉스는 “너희 들이 이 돈을 아냐”고 “이것도 엄연히 40년동안 써왔던 것”이라며 화를 낸다.

 

※ 영화적 여담 : 새로운 TV회사에서 같은 팀으로 일하는 ‘도마슈케’가 자신이 직접 찍은 결혼식 영상을 보여주면서 그 유명한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뼈다귀가 우주선으로 바뀌는 장면을 패러디한 것을 보여주는데(결혼식 장면에서는 부케가 내려오면서 웨딩케이크로 변한다.) 알렉스는 (아마도)미국의 영화를 접해보지 못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장면도 재미있다.

 


3. 동서독의 합치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사람들은 합쳐진다. 알렉스가 다니던 회사는 서독의 TV회사와 합쳐지고 그곳에서 서독 출신인 도마슈케와 한 팀이 된다. 둘은 좋은 호흡으로 전세계 방송이 나오는 위성을 아파트 가득 채운다. 이 콤비는 직업적인 것을 넘어 엄마를 속이기 위한 프로젝트에도 투입된다. 엄마가 병원에서 집으로 옮겨올 때 방을 세팅하고(터전을 마련하고), 곤란한 상황이 생길 때(위험에 처했을 때) 뉴스 내용을 만들고, 도마슈케는 아나운서나 기자(상황을 대변)로 출연한다. 화면에서 말하는 도마슈케는 영락없는 사회주의의 신봉자처럼 보인다. 한편 누나는 새로 동거에 들어간 서독 출신 애인과 둘째를 가진다. 단순히 사람과의 교류를 넘어 (영화에서의 표현처럼) 동서독이 합쳐지고 낳은 미래에 비유한다.

 

둘의 첫 대면. 밑의 그릇에 써져있는 O와 W는 각각 동쪽(Ost)과 서쪽(West)를 뜻한다.

 

영화가 그렇게 무르익어 갈 때쯤, 누나의 첫째 딸인 파울라가 걸음을 시작한다. 침대에만 누워있던 엄마도 드디어 자신의 두 발로 걷는 것에 성공한다. 아직 장벽이 허물어진 것을 모른 엄마가 첫 번째로 본 것은 이케아 간판과 동독에서는 배치를 꿈도 꾸지 못할 화려한 가구를 가지고 이사온 부퍼탈(서독지역) 출신 청년들이다. 엄마는 좀 더 활동 반경을 넓히며 큰 도로에 들어서고, 거기에서 두 번째로 레닌 동상이 헬리콥터에 실려 날아가는 모습을 본다. 영화 제목이 왜 <굿바이 레닌>인가에 대한 간결하고 강렬한 장면이었다.

 

굿바이 레닌! 자세히 보면 CG티가 팍팍난다.

 

10년이라는 세월을 레닌주의에 바친 어머니를 뒤로하고 하반신이 없는 레닌은 석양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이는 동독에서 사회주의가 뿌리가 뽑힌 채 저 멀리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후에 알렉스는 이사온 서독청년들을 난민이라고 설명하고, 동독이 망명자들을 받아준 것이라는 거짓뉴스를 만든다. 그때, 어머니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도울 일이 있지 않을까? 여름 별장을 개조해서 사람을 살게 하면 되잖아.

 

사회주의에 헌신했던 어머니가 했던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은 대사다. 어쩌면 이 대사는 후에 있을 어떤 일에 대한 복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장벽이 허물어진 이후 서독은 마침내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사람들은 동서를 가리지 않고 거리로 나와 축포를 올린다.

 

한편, 알렉스가 엄마를 위해 서독(내지는 자본주의를 표상하는 제품)의 내용물을 동독 제품 병에 담는 것도 조화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통일 이후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에 흡수된 동독 사람들을 비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불순한 가구들이...


4. 엄마와 거짓말

 

이제는 포커스를 영화의 서사로 옮겨 보기로 하자.
영화에는 두 가지 종류의 거짓말이 나온다. 첫 번째는 아들(알렉스)의 거짓말. 어머니의 두 번째 심장마비를 막기위해 장벽이 허물어지고 통일이 된 것을 숨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오히려 아이러니를 느꼈다. 동독 개국 40주년 기념일에 TV를 보며 나이든 정치인들을 ‘한 물 간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던 그가 엄마를 위해 그 여느 때보다 동독이 잘 유지되고 있고 통일 이전의 모습을 보존하는 데에 자신의 역량을 쏟기 때문이다. 사실 눈썰미가 있다면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알렉스의 거짓뉴스들을 보면 실소가 나온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알렉스의 거짓말이 달갑지 않다. 엄마의 생일날 이웃들이 모두 모여 축하를 해준다. 알렉스는 엄마에게 노래를 배운 소년단 아이들을 돈으로 매수해 노래를 부르게끔 하고, 여자친구 라라의 아버지를 실제와는 다른 '농어학교 교사'라고 소개한다. (실제로는 요리사) 알렉스는 그것이 엄마에 마음에 드는 것이라 하지만, 라라는 복도로 나온 뒤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가 불쌍해. 그리고 네 거짓말은 소름 끼쳐.

 

이 시점에서 과연 알렉스의 거짓말이 정말 엄마를 위한 것인지 헷갈리지 시작한다. 선한 의도(엄마가 죽으면 안돼.)로 시작했지만 조그마한 거짓말은 점점 눈덩이처럼 커져만가고, 점점 그의 거짓말을 끝내야 할 시점도 다가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스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엄마가 자신의 거짓말에 속은 채 (독일 통일을 모른 채) 삶을 마감했다고 믿는다. 

 

 

어떤 뉴스가 나무책상을 데스크로 쓰겠는가

 

두 번째 거짓말은 엄마의 거짓말이다. 어쩌면 영화 전체를 통틀어 이야기의 갈등을 최고조로 올리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서독으로 망명한 아버지가 여자와 바람이 난 것이 아니고 가족들을 모두 망명 시키려 했었던 것. 그리고 서독으로 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편지를 썼지만 엄마는 그것을 개봉도 하지 않고 부엌 천장 뒤에 숨겨왔다는 것이었다. 

 

마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두 아이를 데리고 비자를 신청하면 나올 확률이 희박할뿐더러, 최악의 경우 자신만 서독으로 가고 아이들을 당에 뺏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독으로 가는 선택을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알렉스와 아리아네는 엄청난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마음속에 10년동안 가지고 있던 비밀을 풀어낸 어머니는 다시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한다. 서독으로 갈 수 없었던 엄마는 여기에서 탈출할 수 없음을 느껴 현실에 맞추어 열성당원으로 행동하고 살아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한 인식을 바뀌게 한 거짓말인 점, 그리고 그것을 본인 입으로 말하기 전까지 들키기 않았다는 점이 아들의 거짓말과 대비를 이룬다. 

 

하지만 그녀를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본인도 좋아하지 않았고, 탈출하고 싶었던 곳에서 남편만을 떠나보내고 10년이 넘는 시간을 삭히며 아이 둘을 키웠다. 그녀가 내뱉었던 초반의 제안서(임부복이 화려하면 안된다.)를 줄줄히 말하는 것도 어쩌면, 그 큰 고통을 잊기 위해 현실을 살아온 엄마가 그 삶에 파묻쳐 무의식적으로 나온 자동적 문장들이지 않았을까?

 

엄마 거짓말 중이야?

 

누나는 그 사이 찬장 뒤에 숨긴 아버지의 편지를 보며 오열한다. 알렉스는 어머니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누나가 찾은 아버지의 주소를 찾아가게 된다.


 5. 아버지와 우주

 

<굿바이 레닌>이 나의 최애 영화 중 하나인 이유에는 스토리 곳곳에 ‘우주’를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알렉스는 얀을 보며 우주비행사가 되기를 꿈꿨고, 환한 대낮에 물 로켓을 하늘로 쏜다. 동독의 우주영웅으로 불린 지그문트 얀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대안-아버지로 얀을 생각했던 알렉스가 그를 다시 마주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만나러 택시를 잡았을 때였다. 택시기사가 된 얀은 처음에 ‘그를 닮았지만 그가 아니다.’라고 잡아뗀다. (영화와는 다르게 실제 역사의 지그문트 얀은 통일 후 독일 및 유럽의 우주관련 기관에서 일했다. 그는 2019년 11월에 타계했다.)

 

이때 알렉스의 독백이 내가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다.

 

내 어린 시절의 우상이 과거의 유령처럼 나타났다.

이제 그는 우주의 신비를 얘기하고 무중력의 느낌을 설명해주는 대신 작고 지저분한 택시를 몰았다.

택시는 우주공간을 미끄러지듯 밤의 어둠 속을 빠르게 날며 기묘한 모양의 은하계를 지나 반제(지명)에 착륙했다.

 

 

얀의 재등장

어쩌면 그 순간은 여태껏 알렉스를 구성하고 있던 우주가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자신을 버린 줄 알았던 아버지가 실은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 그는 이제 자신이 10년동안 잊었던 것을 다시 마주한다.

 

홈 파티가 한창인 집을 방문하여 아버지를 기다릴 동안 알렉스는 자신의 이복동생들과 쇼파에 앉는데, TV에서는 샌드맨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도 샌드맨을 좋아한다. 절반의 유전자가 같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알렉스를 본 아버지는 깜짝 놀라고 이내 초조함을 느낀다. “새 동생들이 생긴 것 같군요.” 오히려 당당한 쪽은 알렉스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고, 아버지를 부르는데 성공한 알렉스는 이제 그의 대안-아버지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알렉스는 또 다시 태연하게 달을 바라보며 “저 위는 어때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얀은 그제서야 자신의 정체를 솔직히 고백한다.

 

저 위는 아름답지. 하지만 너무 멀어.

 

여기에서 우주는 알렉스가 꿈꿨지만 끝내 다다르지 못할 이상적 세계(동독)를 뜻하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가까워오고, 알렉스는 이제 이 모든 연극을 끝내야 할 때가 왔다고 직감한다. 이제까지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로 거짓뉴스를 준비하는데, 서독과 동독이 통일을 하고 새로운 국가 원수 역할에 ‘지그문트 얀’을 캐스팅한다. 알렉스에게 그 행동은 자신의 어렸을 적 우상을 낡은 택시기사에서 국가원수로 바꾸며 이뤄질 수 없는 이상향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웃기지만 말이다. 

 

이리 해놓으니 국가원수 역할에 어울리는 것 같기도..


6. 마지막

 

엄마는 아들의 마지막 걸작품을 본 뒤 며칠 후 죽는다. 그 날은 (알렉스가 꾸며낸) 동독 개국기념일이자 통일 하루 전 날이었다. 그 날은 새로운 독일의 탄생일 임에 동시에, 구 시대의 동독인 한 명의 사망일이기도 한다. 그것은 한 세대가 바뀌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세대의 유산이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인이 된 알렉스는 밤에, 어두운 밤 하늘을 향해 어머니의 유해를 쏘아 올린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어린 날의 물로켓과 달리 이번에 날린 폭죽 로켓은 하늘에게 환하게 터지며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굿바이 레닌>은 20세기 후반 유럽사에서 중요한 이 장면을 한 가족의 역사와 훌륭하게 엮는 것을 성공하며 끝난다. 그 역사에는 싸움과 갈등, 차이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화합도 있었다. 영화 러닝타임이 흐르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성장해나가는 알렉스를 마주하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이런 알렉스의 독백이 나온다.

 

어머니가 마음속에 담고 간 조국은 그녀의 믿음이 실현된 이상향이었다. 세상에 절대 존재할 리 없지만 어머니와 함께 내 기억 속에 항상 남아 있을 것이다.

 

알렉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동독의 모습이 엄마에게 이상향이라고 믿었지만, 엄마가 결국 아들의거짓말을 알고도 모른 척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독백은 오히려 알렉스가 본인이 원했던 이상향을 본인 스스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들게한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것은 다소 허무하게 일어났는데, (동독 베를린 지구당 제1서기 귄터 샤보프스키가 기자들 앞에서 "동독의 모든 주민이 국경을 넘어 여행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결정"했고, 그것이 "즉시"가능하다고 말해버림)

이 때문에 서둘러 통일이 됐고 그 휴유증은 계속 되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지 30년도 더 지났지만, 그 이전의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양식이 완벽히 변하기는 힘들것이다.

 

우리도 계속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 기술이 발전하며 삶의 방식이 바뀌기도 하고, 국가 내외부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우리 삶을 관통하기도 한다. 그때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또 내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고 변화해나갈 것인가는 계속해서 풀어가야할 숙제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