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장 배워보고 싶은 언어가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프랑스어를 택할 것이다. 독일어가 단단하고 논리적인 느낌이라면 프랑스어는 그 대척점에서 부드럽고 감정적인 언어로 느껴진다. 사람마다 의견이 갈릴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주뗌므’가 ‘이히 리베 디히’보다 좋다. 한국어도 ‘사랑해’와 음운이 맞기도 하고.
오늘 가져온 영화는 2003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Love Me If You Dare>로 프랑스어 원제는 [Jeux D'Enfants] ‘어린이 게임’이다.(구글의 도움)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마리옹 꼬띠아르가 여주인공으로 나오니, 그녀의 젊었을 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또한 특유의 프랑스 영화 감성을 담고 있으며, 서사의 치밀함보다는 두 남녀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감정에 좀 더 초점을 맞추는게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1부 : 게임
주인공인 소피(마리옹 꼬디아르 扮)와 줄리앙(기욤 까네 扮)은 어렸을 적부터 친구로 지내던 사이인데, 둘은 어떤 게임을 한다. 그것은 바로 서로 번갈아 가며 장난을 치는 내기를 거는 것. 내기의 규칙은 간단하다. 회전목마 모양의 한 상자를 서로 주고받으며, 상자가 있는 쪽에서 없는 쪽에게 내기를 제시하고, 상대방이 그것을 해내면 상자를 넘기는 식.
이 내기의 시작은 폴란드에서 프랑스로 전학 온 소피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줄리앙이 보고 본인의 손에 들려있던 예쁜 회전목마 철통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가끔 빌려줄래?”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소피는
“줬다 뺏으려면 맨입으로는 안되지. 내기 할래?”
그때부터 둘의 장난스러운 게임 (아마도 원제는 이것을 표현했을 것)이 시작된다. 그들의 첫 장난은 줄리앙이 소피를 괴롭힌 아이들이 탄 버스의 기어를 D로 바꾸어버린 것. 그 뒤로 둘은 내기로 장난을 걸 때마다 회전목마 통을 서로 주고받는다. 아이들이 치는 장난 이래 봤자 얼마나 되겠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생각보다 그 수위(?)는 아슬아슬하다.
국어시간에 소피가 ㄱ(프랑스어로는 b가 되겠다)으로 시작하는 거시기, 갈보, 걸레와 같은 음란한 단어를 일부러 선생님 귀에 들리게 말하는가 하면, 줄리앙은 선생님의 얼굴과 옷에 잉크를 뿌린다. 그렇게 둘은 떨어질 수 없는 친구 사이가 된다. 학교에서는 이 둘은 문제학생으로 지정하고 떨어뜨려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또 장난을 치는 바람에 교무실에서 끊임없이 재회를 한다.
소피의 언니 결혼식에서 어린 소녀와 소년은 탁자 밑에서 혼인서약할 때 ‘싫다고 하기’를 내기로 건다. 그리고 서로의 성기를 확인하고(이것도 내기였나 보다) 서로의 입술을 가까이 다가가 보지만, “친구 인 게 편해.”라며 그들은 식탁보를 끌어당기며 결혼케이크를 엎는 장난을 한다.
하지만 바로 그날, 암 선고를 받은 줄리앙의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가고, 결국 세상을 떠난다. 줄리앙은 병원에서도 내기의 방식으로 엄마의 병이 낫길 바란다. 체스판 타일처럼 된 병원 바닥에서 ‘두 칸을 뛰는 데 성공하면 엄마가 나을 거야.’라는 식으로. 하지만 ‘네 칸을 뛰면 엄마가 오늘 당장 퇴원할 거야.’라고 뛰었을 때, 엄마의 생명이 정지돼 버린다.
어쩌면 이 장면은, 줄리앙이 건 내기에 실패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에게는 평생 동안 남을 컴플레스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즉, 내기와 현실을 연결하면 안 된다는 것 같은. 이렇게 엄마를 잃은 어린 소년을 위로해주는 것은 무덤 옆에서 ‘라비 앙 로즈(장미 및 인생)’을 부르는 소피다. 그 순간 소피를 극도로 싫어한 아버지가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란 것을 깨달았는지 소피 언니에게 전화를 하고 자신의 집에 소피를 초대에 자고 가라 말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줄리앙의 시각에서 진행된다. 중간에 나오는 독백도 줄리앙의 것이고, 가족사와 주변 상황을 묘사하는 것도 주로 줄리앙의 입장이다. 소피와의 게임만 앞에서 얘기를 했지만, 1부의 또 다른 중요한 소재는 줄리앙의 엄마다. 내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줄리앙은 ‘엄마의 암 말기 선고’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가 점점 사라지면서, 어쩌면 줄리앙은 그 슬픔을 소피와의 내기로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려 하고, 엄마의 빈자리를 소피로 채우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 2부 : 복수
서로 맞은편에 누워 동침을 한 어린 줄리앙과 소피, 라비앙 로즈가 흘러나오고 ‘아주 푹 잤다.’는 줄리앙의 독백이 끝남과 동시에 10년이 지난다. 둘은 또 깨자마자 티격태격. 그리고 내기 규칙은 역시나 변하지 않았다. 줄리앙은 수학 시험을 보는 소피에게 속옷을 위에 입으라고 하고, 운동장에서 만난 남자의 뺨을 서로 때린다.
어린 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둘은 성인이 되었다는 것.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둘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흐른다. 소피가 수학 시험을 보고 있을 때, 줄리앙이 다른 여학생을 꼬시는 것을 보고 소피는 흔들리고, 또 반대로 학교의 체육교사와 잤다는 소피에 말에 줄리앙 역시 얼굴이 굳는다. 집으로 가는 골목길, 둘은 평소처럼 말싸움을 하다가, 그들 앞에 차가 멈춰 선다. 그리고 그 둘은 그 위로 올라간다. 소피는 그때 ‘키스해줘’라고 말하고, 둘은 그렇게 격렬한 키스를 벌인다. 차에서 내려와 골목으로 들어온 둘, 사랑에 의한 진심의 키스를 했던 소피는 ‘사랑해줘’라고 속삭이지만, 줄리앙은 ‘응 그래’라고 그것을 내기로 치부해 버린다. 소피는 줄리앙의 이 태도에 크게 실망한다.
한편, 줄리앙의 아버지는 그에게 화를 내며 본인과 연을 끊거나 소피와 연을 끊으라는 선택을 하라고 한다. 줄리앙은 회전목마를 들고 소피에게 그녀의 진심을 내기로 치부한 것을 잘못했다 빌지만, 소피는 그런 그에게 꺼지라 말한다. 며칠 뒤, 소피는 그를 용서할 생각으로 도서관으로 향한다. 테이블에 앉아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며 ‘내기 때문에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르겠어. 네가 먼저 얘기해줘’라고 연습하지만 줄리앙의 앞에 서면 진심을 말하지 못하고 언쟁이 시작된다. 둘은 또 티격태격하다 소피는 버스를 탄다. 버스가 문이 닫히고 출발하자 줄리앙은 그제야 그 뒤를 쫓으며 ‘사랑해 소피’라고 소리치지만, 유리창 안 쪽의 소피는 그 말을 들을 수 없다.
그렇게 4년이 흐른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소피에게 줄리앙이 찾아온다. 줄리앙이 소피에게 물어본 것은 “드레스가 있느냐.”라고 묻고 며칠 후 근사한 레스토랑에 간다. 줄리앙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라고 말한다. 소피는 그것이 프러포즈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어렸을 적, 언니의 결혼식에서 약속했던 ‘혼인 서약 거부하기’까지 꺼내며 진심을 내보이지만… 이 모든 것은 줄리앙이 소피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꾸몄던 일. 사실 줄리앙은 약혼자가 있었으며, 소피에게 주어를 쏙 뺀 채 프러포즈하는 척을 했던 것. 그렇게 그는 자신이 통쾌한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고, 소피와의 인연을 영영 끊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 소피 역시 줄리앙을 엿 먹이기 위해 드레스를 입고 식장에 나타난다. 그리고 줄리앙에게 회전목마를 넘기며 어린 시절 걸었던 내기를 종용한다. “결혼 서약에 싫다고 해.” 하지만 그는 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냐는 신부님의 질문에 소피는 또 한 번 본인이 반대를 외친다. 아버지가 불 같은 화를 내고 결혼식은 엉망이 된다. 철길 위에서 기차에 치일 소피를 구하지도 않은 줄리앙. 소피는 10년 동안 보지 말자는 내기를 건 채 그의 앞에서 사라진다.
# 3부 : 미녀
줄리앙은 이제 한 가정의 어엿한 가장이다. 하지만 삶의 원동력을 잃었다. 그의 삶은 무미건조하기만 하고 재미가 없다. 소피와 약속했던 10년이 되어가자 그는 무의식 적으로 모든 ‘시간’에 대한 묘사를 ‘10년’으로 치환한다. (이 보고서를 준비하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 와 같은) 그러나 소피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소피의 남자 친구이자 남편 정도로 모이는 축구선수가 골을 넣는 장면을 보며 자신의 아이들에게 ‘10년 동안 비참하게 살아본 적이 있어?!’라고 다그친다. 그때, 아내가 회사에서 한 소포가 왔다고 말한다. 그 소포 안에는 놀랍게도 내기의 징표인 회전목마 상자가 들어있었고, 거기엔 ‘내기할래? 소피가.’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이제 다시 줄리앙의 피가 끓기 시작한다.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줄리앙은 소피와 헤어진 지 10년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결혼기념일 10년이 되는 날, 소피의 집을 찾아간다. 역시나 그를 반기고 있던 것은 소피의 장난. 그를 스토커라고 신고하고 경찰과의 도로 추격전을 펼친다. 그때 그의 상태는 마약을 했을 때보다도 더 흥분된 상태다.
하지만 그는 추격전을 벌이다 트럭에 부딪치고, 소피는 병원으로 도착하지만 그녀 앞엔 온몸에 화상을 입은 한 남자가 산소호흡기를 끼고 누워있다, 고 하지만 이것 역시 소피를 골탕 먹인 줄리앙의 장난.
둘은 병원 앞에서 비를 홀딱 맞으며 다시 만나며, 라비앙 로즈를 부른다. 환상 같은 시퀀스 몇 장면이 지나가고, 줄리앙의 아내와 소피의 남편은 사라진다. 하룻밤의 소동이 지나가고 그들이 아침에 향한 곳은 줄리앙이 감독을 맞은 새로 건축 중인 공사현장. 그 둘은 이제 아스팔트가 뿌려질 곳에 서로를 안고 있다. 곧 둘 위로 콘크리트가 떨어진다. 키스를 하는 그 둘은 그대로 시멘트에 박제된다. 맨 처음, 영화 시작에서 나온 맨트처럼. 어린 줄리앙이 말한 ‘절대 못해본 게임’인 ‘시멘트 속에 파묻히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은 상상 속에서 늙은 그들이 그 나이 때까지도 내기를 하며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난다.
# Q 그래서 내기냐 사랑이냐. A 즐거움이요?
세상에 있는 많은 종류의 사랑 중, <러브 미 이프 유 데어>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상황적으로는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두 사람이 보였고, 둘 사이의 근원적인 감정은 즐거움이라 생각했다.
줄리앙과 소피는 서로가 같이 있을 때 가장 즐거웠다. 엄마의 유품과 같은 회전목마 통을 주고받으며 내기를 하고, 가끔은 서로를 떠보기도 한다. 어렸을 적 가장 재미있는 건 ‘같이 웃고 떠들고 놀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도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면서 즐거움 뒤에 있던 그들의 진심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에 의해 생긴 10년의 우정은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는 큰 벽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 감정이 더더욱 ‘내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내기’라는 것은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어쩌면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일 수 있다.
그래서 서로의 진심을 모르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고, 자신의 진심을 먼저 내보이는 것도 힘들다. 무엇보다, 서로의 마음이 틀렸다는 가정하에 서로에게 다칠까 진심을 쉽게 내보이지 못하고 둘은 결국 어긋나고 만다. 한 번 꼬인 것은 다시 되돌리기 어렵고, 오히려 ‘복수’라는 틀로 그들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다시 10년이라는 공백이 주어진다. 첫 번째 4년은 복수의 시간이었지만, 두 번째 10년은 그들이 다시 서로의 중요성을 알고 합쳐지는 시간이다. 한편으로 이미 ‘내기’로 인해 함몰된 그들의 인생을 ‘내기’가 다시 끝내버리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시간이기도 한다. 종단에 그들은 진심을 말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역시 ‘내기’였던 ‘시멘트에 갇히기’로 끝나니까.
그래서 난 이 영화가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진심을 표현하지 못하고 어긋난 둘은 물론이고, 그런 주인공들의 주변인들은 그동안 ‘진심’이 아닌 것을 ‘진심’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들에겐 이것이 둘의 ‘장난’내지 ‘내기’에 불과했던 것이 되어버리니까. 하지만 줄리앙에게 소피는 엄마의 부재와 즐거움이 필요했던 그에게 최고의 친구였을 것이고, 소피에게 줄리앙은 상처 받은 자신을 대해준 친구이자 편안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서사적인 측면을 빼고 둘 만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아마도 영화는 친구 이상 연인 이하인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어 주거나 진실을 말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싶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영화의 또 하나 포인트. 프랑스 곡으로 아주 유명한 '라비 앙 로즈(장미빛 인생)'이 계속 변조되며 나온다. 영화 <인셉션>에서도 마리옹 꼬띠아르가 중요한 역할로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킥'을 할 때 이 노래가 사용된 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E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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