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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우리의 인생 영화

4. [어둠 속의 댄서] 사랑을 예감하는 일

 

 

근황 토크

 

 

최근 영화를 안 보고 있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못 보고 있다'라고 적을 텐데, 그렇게 적는 일조차 면구스러울 정도로 너무 자발적으로 안 보고 있다. 영화를 보는 일이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살면서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아니면서 왜 벌써 이럴까. 진득하니 앉아서 두어 시간가량 가만히 보는 일에 싫증을 느끼나. 그거 같다, 권태기. 

 

영화에 대한 요즘 근황을 적었는데 이어서 오늘은 그냥 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인터뷰 컨셉인데 왜 자기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솔직히는 인터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변명을 또 끄적이자면 코로나 19로 인해 면대면 약속을 잡기가 조금 멋쩍달까. 그런 요즘이다. 비대면 인터뷰를 하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그 순간 아차 싶었다. 비대면 인터뷰 요청은 정말 친한 짱친에게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버린 거다. 직장 동료나 지인들에게 '(서면 말고 줌이나 디스코드나 아무튼 음성 중심의 프로그램을 활용한) 비대면 영화 인터뷰 하실래요?'라고 말하는 것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근래 알았다. 그래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이번에는 인터뷰에 실패했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일명 <내 인생 영화> 편이다.  

 

그러니까 나는 요즘 영화와 권태기다. 왜 이런 권태기가 시작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영화는 여전히 좋다. 좋아한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걸 그냥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무언가가 내 안에 남게끔,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런데 그 뭐라도를 하기 싫어가지고 안 보는 것 같다. 권태기가 왜 시작되었는지 쓰다 보니 깨달아버렸다. 

 

이 권태기는 극복하기 힘들어 보인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지우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뭐라도 하지 않고 영화를 보았던 적이 사실 다수였는데, 시간이 지나고나면 늘 후회했다. 가물가물하다는 것이 허망하달까. 분명 보았는데, 그리고 내 마음도 이리저리 움직였던 것 같은데, 그걸 왜 기억하지 못하지. 그걸 보았다고 할 수 있나. 없다! 결론은 자주 거기에 다다랐고, 나는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다른 방향으로라도 권태기 극복을 강구해야 한다. 뭐라도 하는 게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큼 덧없는 게 없으니까. (사실 대충 살자, 모먼트인 나는 그 덧없는 걸 자주 했다.) 영화에 처음으로 어떤 예감을 느꼈던 때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 그러니까 첫 만남 이야기.

 

 


때는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영상학과에 입학하긴 했는데 아직 영상이 뭐고 영화가 뭔지 몰라 그냥 이리저리 대충 방황하던 21살 때. 엄밀히는 영화와의 첫 만남이 아니다. 어렸을 때 영화를 몇 편 본 적이 있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학교 과제 때문에 몇 편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이 순간을 첫 만남이라고 일컫는 건, 그 순간에 어떤 물리적인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와 나 사이에. (이렇게 말하면 영화가 당황스러울 수 있으니까 더 정확하게는, 그런 물리적인 충돌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미디어 어쩌구, 라는 강의에서였다. 그 강의는 미디어에 관한 정보들, 그러니까 아주 먼 옛날부터 미디어가 어떤 모양의, 어떤 역할의 것이었는지를 살펴보며, 그 미디어라는 창으로 당시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을 또 역으로 살펴보는 식이었다. (선생님은 고대 미술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도 미디어로 설명하셨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사회학, 철학, 예술학(?), 문화학(?) 등이 혼재된 내용이었는데 나로서는 그런 수업이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에 되게 신기해하면서 수업을 들었다. 무언가를 표현함에 있어,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가 그 표현에 반영된다는 게. 당연한 사실이지만 당시 나는 그런 걸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연한 사실이 신기했다. 어느 날엔가는 선생님이 영화 한편을 보여주겠다고 하셨다. 영화 제목은 <어둠 속의 댄서>였다. 

 

 

 

 

 

당시 나는 정말 영화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어떤 이론을 배우지 않는다는 즐거움으로 무장해 있었다. 불을 꺼 어두운 강의실, 스크린 위로 영화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두 시간이 지나고, 나는 정말 그 자리에 못 박힌 사람처럼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울기도 했고 (하마터면 강의실에서 오열할 뻔했다. 오열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느라 기진맥진하기도 했다.) 끔찍하기도 했고, 난처하고 곤혹스러웠으며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리고 나는 사람이 압도당할 때 온몸이 진동하는 것처럼 떨린다는 걸 알았다. 장면들이 물리적으로 나를 찍어 누른 것처럼, 나는 처음으로 '영화에 졌다'라는 기분을 느꼈다. 

 

 

어둠 속의 댄서

 

내용은 간단하다. 시력을 잃어가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혼자 아들을 키운다. 시력을 잃어가는 병은 유전이다. 그래서 아들도 언젠가 시력을 잃을지 모른다. 아들만큼은 아니기를. 그 마음으로 그녀는 돈을 모은다. 언젠가 있을 아들의 수술을 위해서다.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는 그녀에게 빛은 소리다. 리듬, 멜로디, 하모니, 그런 것들. 그녀의 귀는 예민하다. 주변의 무분멸한, 불규칙적인 소리에도 어떤 패턴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주변의 소리들은 곧 음악이 되고, 그 순간에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뮤지컬이라는 환상이 납작한 인생을 부풀게 한다. 시력을 잃어갈수록 환상은 더욱 빈번해진다. 그런데 그녀에게 문제가 생긴다. 집주인에게 돈을 빌려준 그녀는, 아들을 위해 모은 돈을 다시 돌려받기 위해 집주인에게 찾아간다. 집주인과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 총성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녀는 누명을 쓴다. 이후 재판을 받고 사형이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쭉 이어진다. 환상은 줄곧 그녀를 찾아온다. 그녀의 마지막까지.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뭘 생각할 틈도 없었다. 영화를 본 직후에는 너무 처음 느끼는 감정이라 이게 뭐지? 싶었다. 나중에는 영화 장면이 정말 나에게 달라 붙어가지고는 떨어지지를 않아서 몇 날 며칠 골몰했다. 주인공의 얼굴, 표정, 목소리. 음악과 이야기들. 그리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카메라에 대해 생각했다. 더 정확하게는 카메라의 시선에 대해.

 

그녀의 현실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위태롭게 흔들렸다가도, 환상이 시작되면 흔들리지 않았다. 구도 역시 정제되어 있고 동시에 과잉적이었다. 현실과 환상, 그 차이가 계속 생각났다. 감독은 왜 그렇게 찍었을까? 살면서 '감독은 왜 영화 내용을 그렇게 했을까?'라는 질문은 해봤어도 '왜 그렇게 찍었을까?'를 질문해본 적은 없었다. 카메라의 시선에 대한, 내 인생 처음의 질문이었다. 그러니까 서사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질문이었고 아마 이 질문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언제 영화를 영화로 생각하게 되었는가, 하면 <어둠 속의 댄서>가 떠오르는 이유가. 

 

그 질문을 시작으로 영화가 소설은 아니구나, 그냥 방송 tv 프로그램도 아니구나, 그냥 정말 영화구나, 영화에는 영화적 무언가가 있구나. 사실 당연한 건데, 당시에는 무언가 엄청난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영화에 골몰했다.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영화에서 관찰할 수 있는 어떤 패턴이나 연출을 해석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마침 다른 수업에서 자크 라깡의 잘 모르겠는 이론을 가지고 영화 분석해 오는 과제가 있었는데 <어둠 속의 댄서>를 가지고 그걸 해보았다. 욕망과 결핍과 어쩌구 저쩌구.... 지금에 와서는 추상적인 말들로 점철된 문장들이었는데, 뭐든지 처음은 놀랍고 짜릿하니까. 영화 속 패턴에 내가 의미부여를 할 수 있다는 게, 그러니까 의미부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게 생소하면서도 재미있었다.

 

 

 

 

 

 

영화를 사랑해도 되겠다는 예감

 

해석이나 의미부여, 뭐 이것들은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내 마음과 생각에 어느정도의 평온이 찾아왔을 때 가능했던 거였으므로, 앞서 이야기한 '영화에 졌다'라는 어떤 상태와는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이기는 하다. 다시 돌아가, '영화에 졌다'는 문장에 내 안에 어떻게 생겼는지를 더 말해야겠다.이제부터 좀 추상적이고 모호한 말들의 남발이지 않을까 싶어 걱정되지만 일단 시작하고 보자면, 나는 그런 걸 느꼈다. '아, 영화는.......'

 

'아, 영화는.......' 

 

저 쩜쩜쩜에 내 심정 거의 모든 게 있다. 그러니까 언어로는 어려운 걸 영화는 해버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언어가 아닌 시간이 쌓이고 쌓이면 사람이 겪는 어떤 빗겨남, 이런 게 거의 비슷하게 재현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경악. 특히 재판 장면에서 나는 너무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억울함'(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느낌이지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이 이렇게까지 [억울함]으로 재현될 수 있다는 게. 만약 소설이었다면 나는 똑같은 걸 느꼈을까? 아니라고 확신한다.

 

 

 

 

 

언어는 너무 지성적(!?!?)으로 온다. 이전 문장과 이후 문장의 연결 고리를 인과적으로 파악하려는 내 뇌가 각각의 문장들을 순서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버린다. 뇌는 영화를 보면서도 그렇게 한다. 이전 컷과 다음 컷을 잘 연결 지어서, 인과 관계를 성립하고 스토리를 만든다. 그런데 뭐랄까, 언어를 읽는 일과 시간을 보는 일 사이에는 약간의 다른 게 있다고 느낀다. 언어는 정말 정직하게 순서대로 온다면 시간은, 그러니까 영화는 한꺼번에 동시에 온다고 해야 할까. 순서가 있다 해도 그 간격이 거의 없는 것처럼 겹쳐있어서 '아, 영화는.......'이 되는 것이다. 

 

그때 나는 예감했다. 이렇게 진짜 같은 가짜를 나는 계속 보려고 하겠지. 무언가 물밀듯 밀려오는 그것들이 너무 진짜 같아서, 놀라워하고 분해하고 또 웃거나 울거나 생각에 잠기거나. 그런 미래가 내 앞에 놓여있겠지. 당시에는 이렇게까지는 구체적인 예감은 아니었는데, 여튼 이름 붙이지 못한 어떤 예감이 확신처럼 왔다. 지금 뒤늦게 이름을 붙이자면 '나는 영화를 사랑하게 되겠다'는 예감이.

 

 


여기까지 쓰고 보니까 내용이 너무 거창하다. 그냥 좋아서 좋아하는 건데 뭘 이렇게까지 이유를 붙이나 싶기도 하고. 그리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닥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저 특징이 유독 나를 흔드는 이유는 또 나에게 따로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려면 너무 많은 내 과거를 훑어야 하므로 과감히 포기하겠다. '그런데 뭐랄까'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서 송구하기도 하다. 너무 확신 없이 말하는 느낌이지 않았을까, 그런 목소리는 읽기 버거울 때가 있으니까. 

 

여튼, 결론은 그거다. 내 인생 영화는 아주 많은데, 그중에 첫사랑 같은 존재를 꼽자면 <어둠 속의 댄서>라는 것. 첫 시작에 대해 쓰면서 권태기는 극복되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전혀 아니지만, 그래도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좀 신나고 즐거웠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권태기는 어떻게 극복하지? 어려운 문제다, 아주 어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