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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풍경의 발견

[나는 전설이다] "슈렉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종종 한 영화를 두 번 넘게 보곤 합니다.

 

보통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들이 대다수인데 가끔 예외도 있습니다. 저는 좀비 영화나 재난물을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만, 유독 여러 번 다시 본 본 영화 중 하나가 프란시스 로렌스 감독의 <나는 전설이다>입니다.

 

 

아래는 최소한의 이해를 돕기 위한 줄거리입니다.

 


 

과학자 로버트 네빌(윌 스미스 분)은 인류멸망 이후 혼자 살아남는다. 다른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 하나로 매일 방송을 송출한다. 우연히 생명체를 목격하지만 바이러스에 감염된 ‘변종 인간’들이다. 네빌은 면역체가 있는 자신의 피로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을 만들기 시작한다.

 

네빌은 변종 인간이 만든 덫에 걸리고, 혈투를 벌이다 의식을 잃는다. 그때 다른 곳에서 온 생존자 애나(앨리스 브라가 분)와 에단(찰리 타헨 분)이 그를 구한다. 애나와 에단은 생존자들이 모인 정착촌에 가겠다는 계획을 밝힌다. 하지만 네빌은 이미 희망을 잃은 상황. 그때 변종 인류가 들이닥치고 네빌과 애나, 에단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무난한 전개에 더해 뉴욕이라는 낯익은 배경과 종말 이후의 세계라는 상상적 세계를 적절한 CG 등으로 조화롭게 묘사한 작품입니다. 혼자 살아남은 사람의 고독감을 형상화하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특이한 점은 감독이 결말을 두 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극장판에서는 제목 그대로 네빌이 '전설'이 되지만, 감독판에서는 정반대로 네빌은 '뻘쭘'하게 돼버립니다. 개인적으로 ‘영웅물’을 혐오 수준으로 싫어하는 저로서는 극장판보다는 감독판이 훨씬 좋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나는 전설이다>에서 제가 발견한 ‘풍경’은 로버트 네빌이 처음으로 또 다른 생존자인 애나와 에단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대략적인 상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부분이 담긴 유튜브 영상도 첨부합니다. 

#로버트 네빌은 좀비 떼와 싸우다가 의식을 잃는다. 눈을 뜨니 집이다. TV에서는 영화 <슈렉>이 나오고 있고, 낯선 여자(애나)와 아이(에단)가 주방에 있다. 이들은 네빌의 전파를 듣고 찾아왔는데, 마침 의식을 잃은 네빌을 보고 데려온 것이다. 셋은 스크렘블 에그와 베이컨을 애나는 생존자들이 있는 정착촌을 찾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네빌은 생존자 따위는 없다며 버럭 화를 내곤 2층으로 사라진다. 화를 가라앉힌 네빌이 다시 돌아와 슈렉에서 나오는 대사들을 따라한다.

 

 

1. TV 속 <슈렉> - 운명과 자유로움 

무엇보다 제일 눈길이 가는 것은 <슈렉>입니다. TV에는 <슈렉> 1편이 나오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괴물 슈렉이 당나귀 덩키와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외딴 숲속에 혼자 살던 슈렉은 자기 자신을 ‘무서운 존재’로 포장하며 다른 존재들과 거리를 둡니다. 그러던 중 덩키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그는 점점 다양한 존재들과 관계를 맺어갑니다. 

덩키를 만나기 전 슈렉과 ‘생존자’를 부정하는 네빌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둘 모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점입니다. 일종의 ‘운명’입니다.

 

슈렉은 날 때부터 괴물로 명명됐고, 그렇다면 으레 보여야 하는 모습들 - 인간들에게 겁을 주는 - 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네빌도 마찬가지로 ‘좀비 바이러스’라는 외부 환경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랬던 슈렉이 덩키를 만난 뒤 점점 자신에게 주어진 괴물로서의 ‘조건’들을 벗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자유로워지는 것이죠. 

여기서 <슈렉>은 애나와 에단이라는 존재가 네빌에게 덩키와 같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비유로도 읽힙니다. 실제로 네빌은 이들을 만난 뒤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슈렉의 마지막 모습과 네빌의 마지막 모습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점에서 네빌이 슈렉의 대사를 줄줄 외우는 모습은 의미심장합니다. 일종의 접신 같다고 할까요? 슈렉의 결말을 알고 있는 네빌로서는, 슈렉의 언어를 말하면서, 슈렉과 하나가 돼 자신의 이 고독감도 언젠간 걷힐 것이라는 주문을 외는 것만 같습니다. 실제로 그 이후로 네빌의 경계심은 급속도로 풀리게 됩니다.

 


2. 낯설지 않은 타자 - 내적 친밀감과 환영

애나, 에단과 네빌이 처음 만나는 순간도 인상적입니다. 이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라기에는 별로 어색해하지 않습니다. 특히 애나와 에단 같은 경우는 남의 집이라기에는 TV를 틀어놓고,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닌데 마음대로 요리를 합니다.

이런 ‘탈어색함’이 가능한 점은 생존자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 전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생존하고 있던 그들이지만, 한켠에는 어딘가 또 다른 생존자가 있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을 겁니다.

특히 애나나 에단 같은 경우 네빌의 전파를 듣고 그를 찾아 이곳까지 왔습니다. 오히려 그의 존재가 낯설기보다는 반가웠을 것입니다. 요새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내적 친밀감’ 정도랄까요. 비록 실제로 만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채널을 통해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알고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친밀감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예인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요새는 사이버강의를 듣거나 할 때 이런 감정이 생기죠.

네빌도 처음에는 애나와 에단에 총을 겨누며 경계하긴 하지만, 약간의 상황 설명과 밥 먹으라는 말에 이상하리만치 고분고분히 식탁에 앉습니다. 그도 생존자를 찾아 전파를 보내긴 했지만 특정 대상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따라서 이때 네빌의 ‘무장해제’는 내적 친밀감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네빌이 식탁에 있는 애나와 에단의 모습을 목격할 때 순간적으로 어떤 환영에 사로잡힙니다. 과거 그의 아내와 아들이 그 식탁에서 같은 구도로 자신을 보고 있는 장면입니다. 짐작건대 네빌은 이 환영과 오버랩된 낯설면서도 낯익은 모습에 긴장이 흐트러졌을 겁니다. 애나와 에단에게도 아내와 아들에게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대입하게 됐을 겁니다.

 


3. 정신을 차리고 보니 - 고독과 회의

이들의 평화로움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정착촌을 찾아갈 것”이라는 애나의 말에 네빌은 화를 참지 못합니다. 생존자는 없다면서요. 그러고는 오므라이스와 베이컨이 담긴 접시를 밀쳐 떨어뜨립니다.

저는 네빌의 이런 행동을 ‘확신’으로 보지 않습니다. 정착촌이 없다고 믿기 있기 때문에 애나의 저 말에 화를 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독한 사람이 스스로를 확신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다들 아실 겁니다. 무인도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가 어느 날은 해변가를 걸었는데, 다음날 가보니 발자국이 사라졌습니다. 이걸 보고 그는 ‘내가 어제 이곳을 왔던 것이 맞나?’ 자문합니다. 고독의 끝판왕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보증하는 타자가 없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맥락에서 네빌의 저 폭력적 행동은 차라리 앙탈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애나의 확신에 대한 고독한 자의 소심한 저항일 수도 있겠습니다. 넌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 하는 질문이 그의 행동에 담겨있습니다. 너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고독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질타이자 질투인 것이죠.

이어서 네빌은 아껴둔 베이컨을 마음대로 요리했다며 불평합니다. 당장 생존자를 만난 기쁨보다, 앞으로 혼자 남을 것에 대한 염려가 더 큰 모습입니다. 초반의 환영은 완전히 사라진 듯합니다.

네빌의 깊은 고독감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부록) 비평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 제 기억에 이 장면이 남아있는 직접적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저는 적지 않은 시간 비평을 공부했습니다. 비평을 공부한다는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비평과 관련된 것들을 읽고 써왔습니다.

그런 저의 심기를 건드리는 지인이 한 명 있었는데, 일종의(?) 사회운동가였습니다. 늘 제가 읽는 책을 슬쩍 보고는 비웃으며 지나갔습니다. 현실에 뛰어들어 치고 박고 싸우는 그에게 제 공부가 가당치 않아 보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너가 하려는 비평이라는 것이 저 영화 속에서 나오는 슈렉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를 밝혀내려는 작업인거지?”

어느 날 이 친구와 <나는 전설이다>를 같이 보다 대뜸 제게 물었습니다. 질문이라기보단 비아냥이었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저 말이 문득문득 귀에 맴돕니다. 창작물에 기생하는 텍스트, 자기놀음이자 끊임없이 원운동을 할뿐인 비평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더구나 읽지도 않는 지금의 시대에 말입니다.

몇 년 전에 이런 고민을 담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때 결론은 모르겠다, 끝까지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였습니다. 지금도 모르겠다, 는 마찬가지입니다만 계속 공부하겠다, 는 말을 지키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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