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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풍경의 발견

[동주] "……시."

아무 생각 없이 보러 갔다가 온갖 생각거리를 들고 나오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저에겐 이준익 감독의 <동주>가 그랬습니다.

 

 

아래는 최소한의 이해를 돕기 위한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동주(강하늘 분)와 몽규(박정민 분)는 사촌지간이다. 일제강점기 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동주는 시인을 꿈꿨고, 몽규는 혁명가를 품었다. 둘은 일본 유학을 중에도 서로 다른 행보를 보인다. 몽규는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데 비해 동주는 절망적인 순간들을 시로 승화했다. 같은 비극의 시대에 서로 다른 지향을 가진 두 친구의 삶도 갈리기 시작하는데.

 


 

이준익 감독이 윤동주 시인을 영화화한다고 할 때 의아함이 앞섰습니다. 솔직히 저에게 이준익 감독하면 영화 <황산벌>의 코믹스럽고 가벼운 이미지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와 코미디는 좀처럼 이어질 수 없어 보였습니다.

 

 


 

영화는 예상과 달리 전반적으로 무겁고 진실성 어린 분위기로 흘러갔습니다. 무엇보다 마지막 씬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동주는 일본 유학 중에 릿쿄대학에서 만난 후카다 쿠미와 한 카페에 앉아있다. 일본 경찰에게 쫓기는 중에 그가 쓴 시들을 쿠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쿠미가 시집의 제목을 묻자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라고 말한 뒤 주저하다 덧붙인다. “......시.”

 

해당 장면의 영상을 찾지 못해서 예고편 영상으로 대체합니다.

 

 

 

1. 윤동주보다 송몽규?

 

이 장면에서 핵심은 “......”입니다. 그러니까 시집의 제목을 말하면서 ‘시’라는 단어를 말하는 데 한참을 주저하는 심리 말입니다.

 

이건 비유하자면 요리사가 자신이 만든 음식을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비로소 “이건... 요리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를 주저하는 상황이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앞 상황, 좀 더 정확히는 윤동주와 그의 친구 송몽규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고향 친구입니다. 일본에도 같이 유학을 갔는데, 둘의 성향은 좀 다릅니다. 윤동주는 다들 아시다시피 시인, 즉 문학적 이상을 품고 있는 데 비해 송몽규는 그야말로 ‘혁명가’입니다. 몽규에게는 조선의 독립이야말로 그의 모든 것입니다.

 

아무리 절친이었지만 이 지향점의 차이는 둘 사이를 갈라놓게 됩니다. ‘독립’이라는 현실적이고 시대적인 부름 앞에 ‘한갓’ 시나 끄적이고 있는 동주가 몽규에게는 하잘 것 없게 보였을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대체로 동주보다 몽규를 더 기억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당시 반응을 보면 강하늘을 보러 영화관에 갔다가 박정민만 머리에 남는다, 는 식의 얘기가 많았습니다.

 

사실 저도 영화의 대다수 부문에서는 몽규에 대한 인상이 더 깊이 남아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영화는 ‘동주’라는 제목을 하고 있지만, 사실상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전면에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중에 소심하게 시나 끄적이며 답답한 행보를 보이는 동주보다는,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나라의 독림을 위해 ‘행동’하는 몽규가 돋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씬을 보고 나서는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몽규는 오롯이 사라지고 동주만이 남았습니다. 정확히는 동주의 주저함, 울먹이듯 자신의 정체성을 겨우 드러내는 그 상황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2. “……시”

 

처음 이 영화를 보고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다음날 바로 다시 영화를 보러 갔고, 주위 지인들에게 영화를 소개해준다는 핑계로 몇 번을 더 봤습니다.

 

전 그 지인들에게 이 영화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끝내 부정하다가 결국은 시, 로 끝나는 영화.”

 

단순히 텍스트로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시”로 끝납니다. 영화 전반을 통틀어 ‘부끄러움’이 동주를 관통하고, 시를 쓰는 동주는 매번 몽규의 행적과 대조되지만 결국은 영화는 시로 끝나는 겁니다.

 

더구나 이 마지막 씬은 플래시백입니다. 말하자면 시간적으로나 인과적으로나 마지막으로 올 장면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몽규의 죽음, 또는 동주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영화를 끝낼 수도 있었겠지만 이준익 감독은 기어코 그 전의 시간을 끌어옵니다.

 

이 둘의 죽음이 마지막이었다면 영화는 시대적 부끄러움을 안고 살던 한 시인의 비극적 죽음, 정도의 메시지를 남겼을 겁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서사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고 내용상 없어도 문제없을 장면을 맨 마지막에 배치합니다.

 

이 서사적 구조만큼 윤동주를 위로하는 게 있을까요. 저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이준익 감독이 윤동주뿐만 아니라 이 모든 시대의 문학을 위로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지금 시대에 너의 고민은 하잘 것 없고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시는, 소설은, 문학은 결국은 마지막까지 남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그거면 됐다.

 

 

부록) 국문과의 비애

 

“이건 국문과를 위한 영화야.”

 

한참을 이렇게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마지막 장면만 보면 된다고 여기저기 홍보를 했습니다. 이 영화야말로 당시 저의 감정을 가장 적확히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죠.

 

앞서 <나는 전설이다>에 대한 글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긴 했지만, 시대와의 괴리감은 국문과로서의 필연적 고민입니다. 내가 끄적이는 글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은 업보로 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물론 <동주>가 정답이 아닙니다. 저는 큰 위로를 받았지만, 사실 감정적인 위안일 뿐입니다. 결국 윤동주라는 이름은 남고, 송몽규라는 이름이 희미해졌지만 이런 상황을 보면 문학의 힘이라기보다는 시대적인 음울함, 매정함이 먼저 떠오릅니다.

 

윤동주는 문학적으로 성공했고, 송몽규는 시대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성공은 남고 실패는 잊혔지만 저는 이게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가 문학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성공이라는 발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실패한 문학인과 성공한 혁명가를 비교한다면 결은 정반대일 겁니다. 실패한 문학인과 실패한 혁명가를 비교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역시 국문과로서 이런 영화는 늘 환영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비애감을 품는 중에는 “그래도 좋아”라는 말 한마디에 며칠을 설레며 버티는 식이죠.

 

여담이지만 이준익 감독도 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지레짐작해봅니다. 아마 한두 번 눈물을 흘리진 않았을 것입니다.

 

*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