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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풍경의 발견

[아메리칸 뷰티] 아름다움이란

이번에 다룰 작품은 샘 멘데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입니다.

 

최소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줄거리를 덧붙입니다.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잡지사 직원 레스터 번햄(케빈 스페이시 분)은 어느날 딸 제인(토라 버치 분)의 친구 안젤라(메나 수바리 분)을 보고 욕정에 사로잡힌다. 이후 레스터의 삶은 180도 바뀐다. 상사를 협박해 목돈을 받아 스포츠카를 사고, 안젤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운동을 시작한다. 마리화나에도 손을 댄다.

 

그때 옆집으로 해병대 출신 대령(크리스 쿠퍼 분) 가족이 이사를 온다. 그의 아들 리키(웨스 벤틀리)는 번햄에게 대마초를 팔면서 가까워지는 중에 대령이 둘의 관계를 동성애로 오해하게 되는데.


 

미국 중산층의 허상, 무의식을 적나라하게 끄집어낸 '문제작'입니다. 어디서나 일어날 법하면서도, 막상 목격하기 어려운 장면들은 과하지 않고 덤덤한 뉘앙스로 풀어내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이 영화에서 소개하려는 장면은 초중반부에 나옵니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리키와 제인은 방에서 리키가 찍은 영상을 본다. 길거리에서 봉지가 낙엽과 함께 바람에 날리는 장면을 보며 리키는 제인에게 ‘아름다움(뷰티)’에 대해 얘기한다.

 


- 아름다움이란?

봉지가 바람에 날아 다니는 것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껴보신 적 있나요. 아마 대부분 없을 겁니다. ‘아름다움’과 비닐봉다리는 영 동떨어져 보이니까요.

 

보통 예쁜 사람, 멋있는 풍경을 보는 경우에 “아름답다”고 표현하죠.

사전을 찾아봐도 그렇습니다. 아름다움은 ‘모양이나 색깔, 소리 따위가 마음에 들어 만족스럽고 좋은 느낌’, 또는 ‘하는 일이나 마음씨 따위가 훌륭하고 갸륵함’ 정도로 정의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대상에서 비롯하는 만족, 좋음, 훌륭, 갸륵함 등의 느낌을 아름답다고 하는 셈입니다. 저 단어들을 통틀어 ‘긍정적’인 것들이라고 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이란 '긍정적'인 무언가로부터 말미암는 감정인 것이죠. 

이걸 기준으로 보면 바람에 날라 다니는 봉지를 보고 아름답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쓰레기 투기, 지저분함, 환경오염 등 부정적인 단어들이 직관적으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저 정의를 다시보면 아름다움은 기본적으로 느낌, 또는 감정입니다. 개인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기제인 것이죠.

이걸 기준으로 보면 아름다움은 일차적으로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입니다. 외부의 '대상' 이전에 개인의 '내면'을 중심으로 한다면 세상에는 다양한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긍정’적인 느낌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도, 반대로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보면 리키의 감정은 지극히 예외적인 차원에서의 아름다움 정도로, 최소한의 정도로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냥 리키는 그런 사람인 거죠.

 

아무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전 장면에서 리키는 한 노숙자의 죽음에서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리키는 부정적 대상에서 긍정을, 그러니까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리키만의 아름다움인 것이죠.

 


- 궁극의 아름다움이란

이렇게 리키의 아름다움은 리키만의 것, 이라고 두면 마음 편하지만 또 너무 시시해집니다. 유별난 리키가 무의미한 헛소리를 하는 게 전부라면 굳이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을 이유도 하나 없습니다.

리키의 아름다움은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나는 건 분명하지만, 결코 리키만의 것은 아닙니다. 

 

리키를 이해하기 위해서 질문을 몇 개 던져보겠습니다.

 

아름다움, 그러니까 긍정적인 대상의 궁극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말하자면 주관을 벗어나, 누구에게나 궁극의 ‘끝판왕’인 대상은 무엇인가?

A는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울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혐오스러운 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00명의 인간에게 100개의 주관이 있는 한, 이들이 인식하는 A는 100개의 A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질문의 답은 ‘인식을 벗어나는 것’, 정도가 될 겁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냄새나지 않고 만질 수 없는 것이어야 100명이 모두 동일하게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인식할 수 있는 것이죠.

누군가는 이걸 신이라고 이름붙일 겁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자연, 에너지, 불가항력 등으로 대상화할 수 있습니다.

뭐라 명명하든, 어쨌든 이 지극히 긍정적인 대상, 그러니까 아름다움의 끝판왕은 사전적 정의와 정반대로 감각과 주관을 벗어난 것들입니다.

 


- 보이는 것 너머

이렇게 정의한 아름다움은 리키의 아름다움과 맞닿아있습니다.

리키는 보이는 것을 보지 않습니다. 죽은 노숙자나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봉지를 보며 그는 그걸 둘러싼 어떤 힘을 떠올립니다. 보이는 것들을 가능케 하는 힘을.

그 힘 앞에서 (사전적 의미의)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차이는 힘을 잃습니다. 죽어가는 노숙자나 재벌 3세도 결국은 이 보이지 않는 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누구나 죽는다”는 경구를 떠올리면 됩니다.

로또 1등 당첨 영수증이나 까만 비닐봉지도 태풍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리고 리키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 불법행위라고 하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아버지가 그를 못살게(?) 굴지만 리키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궁극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그저 무기력하게 휘날리는 존재들인 거죠.

아는 척을 좀 하자면, 이건 모 철학자가 정의한 ‘숭고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숭고함이 작동하는 상황으로 집채 만한 파도가 몰아치는 상황을 제시합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거기서 느끼는 두려움, 불안감 등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거대한 파도를 바라보면서 그 이상의 어떤 존재를 떠올리는 것, 보이는 것 너머의 무엇, 보이는 것들을 가능케 하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숭고함입니다. 리키가 말하는 아름다움과 일맥상통하죠.

감히 맞설 수 없는, 보이는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어떤 힘, 또는 존재. 이토록 이토록 '아름다운' 대상 앞에서 우리는 그저 무릎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