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한/풍경의 발견

[노스텔지아] 쓸모없이

무의식의 영역을 설명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 ‘풍경의 발견’이라는 기획을 구상할 때는 영화의 무의식을 건드려보려 했는데, 가면 갈수록 의식의 차원으로 넘어오는 것 같습니다.

 

무의식적인 감각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의식적인 행위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한 장면에 대한 집요한 감상이라는 측면에서 글을 이어나가 보겠습니다.

 

 

 

 

 

 

이번에 다룰 작품은 소련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텔지아>입니다.

 

최소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줄거리를 덧붙입니다.

 


 

러시아 작가 안드레이 고르차코프(올레그 얀코브스키 분)는 음악가 소스노프스키의 생애를 연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한다. 통역을 맡은 유제니아(도미지아나 지오다노 분)의 안내를 받으며 소스노프스키의 여정을 되밟는다. 그러던 중 안드레이는 종말론자인 도메니코(이어랜드 조셉슨 분)을 만나게 된다. 그는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서는 자신이 희생해야 하고, 동시에 두 곳에서 불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메니코는 안드레이에게 또 다른 하나의 불을 밝혀줄 것을 부탁하며 촛불을 건넨다. 안드레이는 러시아로 돌아갈 결심을 하는데 그때 마침 도메니코가 로마의 광장에서 연설을 하기 시작한다. 이 세상은 다시 구원돼야 한다는 말을 하며 그는 자기 몸에 불을 붙인다. 안드레이는 한쪽 모퉁이에서 도메니코가 건넨 촛불에 불을 밝힌다.

 


 

시적이면서 서정적인, 그리고 문학적인 영화입니다. 여기서 제 인상에 깊이 남은 장면은 안드레이가 촛불을 밝히고 한쪽 모퉁이에서 다른 모퉁이로 이동하는 장면입니다.

 

# 안드레이는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코트로 바람을 막으면서 조심조심 움직인다. 하지만 몇 번이고 불은 꺼지고 만다. 그때마다 안드레이는 첫 모퉁이로 돌아가 초에 불을 붙이고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불이 꺼지지 않고 반대편 모퉁이에 다다를 때까지.

 

 

 

- 영상과 시간, 그리고 편집

 

이 장면이 무엇보다 인상 깊은 것은 저 장면을 하나의 테이크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안드레이가 몇 번이고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을 편집 없이, 자르지 않고 쭉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자그마치 9분이 넘습니다.

 

그게 뭐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귀찮아서 편집을 안 했던 걸 수도 있을까요.

 

제 호들갑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영화와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영화, 또는 영상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겠지만, 저는 그 중 하나로 영화는 ‘시간의 매체’라고 정의합니다. 이런 점은 활자, 즉 글과 비교하면 극명히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남자가 사과를 먹다가 뱉는 장면을 묘사한다고 해봅시다. 글로 표현해보면, “남자가 사과를 먹다 뱉었다.” 정도겠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남자가 사과를 얼마나 먹었는지, 그러니까 저기서 묘사한 행위를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이어갔는지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영상에는 실제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배속을 하든 슬로를 걸든 간에, 어쨌든 기본적으로 실제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은 동일하게 흘러갑니다.

 

그런데 메시지, 그러니까 ‘사과를 먹다 뱉다’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굳이 그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영상은 비효율적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과를 먹다 뱉는 시간이 10분이라면, 영상을 보는 사람은 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고스란히 10분을 할애해야 합니다. 문자로는 1초면 이해할 내용인데 말이죠.

 

여기서 바로 편집의 기술이 나옵니다. 기본적으로 불필요한 시간들을 잘라내는 것, 이 편집인 것이죠. 사과를 먹는 장면을 5초 보여주고, 바로 뱉는 장면을 붙인다면 영상도 상당히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독은 이런 고민을 할 겁니다. 사과 먹는 장면을 1초만 보여줄지, 5초 정도 보여줄지, 아니면 10분을 고스란히 담아낼지요. 그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영화는 간결하고 효율적일 것이고, 길면 길수록 지루(?)하고 비효율적일 겁니다.

 

 

 

 

 

 

- 비효율성/비합리성 또는 사이비

 

효율과 비효율. 타르코프스키가 저 장면을 하나의 테이크로 보여준 것은 후자를 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안드레이가 모퉁이에서 반대쪽까지 촛불을 옮긴다. 불이 꺼지면 다시 돌아가 처음부터 시작한다.” 두 문장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을 자그마치 9분 동안 보여주니까요.

 

도대체 타르코프스키는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영화를 편집했을까요.

 

효율성은 합리성과 맞닿아있습니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합리적인 인간은 효율성을 좇기 마련이죠. 직선으로 뻗은 길을 놔두고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걷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받을 겁니다. “너, 무슨 일 있냐?”

 

합리적으로 보면 비효율적인 행위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거죠.

 

영화로 돌아가서, 안드레이의 행위는 그럼 어떨까요. 그가 촛불을 켜고 조심히 옮기는 것은 도메니코의 부탁 때문입니다. 자신의 희생과 함께 동시에 두 곳에서 불이 밝혀져야 종말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을 실천한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얼토당토않습니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종말을 외치고 다니는 사람에 현혹된 것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일종의 사이비인 거죠.

 

네, 맞습니다. 안드레이는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러니까 비효율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겁니다.

 

 

 

 

 

 

- 사이비의 시간

 

그러니까 이 장면이 인상 깊은 것은 비합리적인 행위를 비합리적인 시간의 형식 속에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좀 도착적인 차원에서의 형식과 내용의 일치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장면에서 시간의 층위를 좀 나눠보면 좀 더 명확해집니다.

 

우선 촛불의 시간이 있겠습니다. 촛불이 켜지면서 시작되고, 꺼지면서 끝나는 시간이죠. 이 시간은 짧아 몇 번이고 반복됩니다.

 

또 다른 시간은 안드레이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촛불과는 반대로 깁니다. 영화 전체 러닝타임보다도 더 긴 게 이 시간이죠.

 

마지막 층위의 시간은 이 9분이라는 시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건 안드레이가 도메니코의 부탁을 실천하는 시간이며, 종말로부터 인류를 구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시간입니다. 이걸 사이비의 시간이라고 이름 붙여보겠습니다.

 

이 장면에 담긴 시간은 곧 사이비의 시간, 비효율의 시간, 비합리의 시간입니다. 말도 안 되는 시간을 말 도 안 되는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죠.

 

비효율의 극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달리 보면 이건 이 장면이 예술적인 이유기도 합니다. 모든 예술은 비효율이니까요. 소리의 과잉(낭비)에서 음악이, 텍스트의 과잉에서 문학이, 몸짓의 과잉에서 춤이 나왔으니까요.

 

괜히 타르코프스키를 '위대한 영상시인'으로 칭송하는 게 아닙니다.

 

 

*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